어둡고 차가운 하늘에서 흐르는 겨울비는 지상에 놓여져있는 것들에 닿으면서 여러가지 소리를 만든다. 높다란 나무가지에 툭 떨어진 것은 잔가지를 거쳐 땅에 닿기전에 한번 더, 나무를 타고 오르는 담쟁이 덩쿨잎을 살짝 건드리며 맑은 소리를 내고는 바락에 쌓인 낙엽에 닿으며 둔한 소리를 낸다. 지붕을 향해 내리꽂히려다 키큰 소나무에 달린 커다란 솔방울을 만난 거슨 솔방을 적시고는 함께 그러나 다른 속도로 목표 지점에 닿는다. 그 빗소리는 둔중하고 무게감이 있는 소리로 지붕을 울린다. 어떤 빗줄기는 다행히 조그만 내에 다달아 조잘대며 흐르는 냇물이 된다. 크기나 무게가 다른 빗줄기들은 다른 높이의 소리를 만들어내며 아스팔트에 닿기도 하고, 나즈막한 잡목숲의 작은 잎들 위에 닿기도 하며 주로 단조의 음계를 만든다.
겨울비 내리는 날은 몸의 모든 세포들이 휴식을 원하는지, 그저 가만 앉아 바라보거나 생각에 감기거나, 아님 흐르는 음악에 몸을 토애 맡기고 싶어진다. 음악이 흐르지 않아도 빗소리가 만들어내는 소리는 그냥 음악이 된다. 슬픈 단조로 흐르다가, 느닷없이 큰북소리로 지붕을 치며 놀라게 하다가, 가끔은 사분음표로, 혹은 바쁘게 십육분음표로 소리를 내기로 한다. 그 간격들은 악보도 없고 내 힘으론 예측이 안되므로, 그냥 소리를 듣는게 나를 편안하게 만든다. 바람이 섞여 빗줄기가 흩날리는 소리는 자유로운 에드리브로, 마치 재즈처럼 몸을 건들거리게 한다. 간혹은 현으로만 이루어진 쿼텟의 분위기로, 가끔은 드럼의 독주를 듣게도 한다. 심심하다 싶으면 어느 금속에 닿으며 심벌즈처럼 크게 울림을 주기도 하고, 큰 소나무 가지에 달려있던 솔방울로 지붕을 때리며 큰북을 두두둥 울리기도 한다.
아.. 내 모든 추억들도 이 겨울비 내리는 날은 흑백영화로 둔갑을 한다. 어떤 부분은 낡은 필름이 영사기와 부딛쳐 내는 금속성의 소리로 찌찍거리며 형체를 알 수 없기도 하고, 어떤 부분은 선명하게 흑백이 구별되기도 한다. 눈을 감고 볼 수 있는 비오는 날의 흑백영화는 오롯이 나만의 것이다. 그 속에 등장하는 모든 배우들은 내가 아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내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끼쳐 나를 만들어 온 인물들이기도 하다. 그 흑백영화 속에는 지금은 사라진 과거의 물건들도 등장한다. 내가 몹시 아껴 한때 내가 어찌나 의지했던지 그것들 땜에 견딜 수 있었던 아픈 시간들이 분명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스토리는 들려주지 않는다. 이미 삭제되어 기억너머로 사라지고 다만 이겨낼 수 있게 나를 지탱해준 고마운 물건들만 보여준다. 그중엔 잠자기 전 몇장의 LP판을 올려놓고 그 음악들이 다 끝나기 전에 내게 잠이란 묘약을 준 낡은 전축이 있다. 중학교 국어시간에 알게된 작가 ‘이상’에 빠져, 내 우울과 버무려지며 헌책방 냄새를 풍기던 그의 책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사춘기때 위대한 스승이었던 도스토예프스키가 있다. 그와 함께 러시아를, 러시아의 음악과 문학을 동경하던 내가 그 소련이라는 나라를 드디어 여행할 수 있었던 건 그로부터 세월이 한참 지난, 지금으로부터는 한참 거꾸로 거슬러 올라간 어느 지점이었고, 역시 그 나라의 문화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던 그것도 내 흑백영화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제는 내게 남아있지 않은, 다만 그 흑백영화속에만 등장하는 많은 것들의 무게가 나를 짓누르며 겨울비 속에 가만 앉아있게 만든다.
겨울비는 조용히 때로는 거칠게 하늘에서 지상으로 흐르며, 나뭇잎을 흔들기도, 지붕을 때리기도, 아스팔트를 적시기도, 작은 시내의 흐름을 빠르게 만들기도, 잔나무가지에 머물렀다 떨어지기도 하면서 나를 천천히 적신다. 겨울비에 젖은 나는 먼날 다시 돌아볼 한편의 흑백영화 속 주인공이 되어, 의자등에 조금 더 깊숙히 묻힌다. 겨울비가 주는 무게감과 내 몸의 발란스를 맞히면 이 분위기를 더 깊이, 더 아프게, 더 행복하게, 더 촉촉하게, 내것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