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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의 시선] 화가 현혜명의 ‘나눔’

지역뉴스 | 외부 칼럼 | 2024-09-11 14:24:43

정숙희의 시선, LA미주본사 논설위원,화가 현혜명의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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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문화부 기자를 맡았던 1980년대 후반, 남가주 한인미술계는 열악했지만 따뜻하고 순수한 무공해 서클이었다. 모두가 서로를 알고 돕고 밀어주던 작은 예술 공동체, 살기 팍팍하던 이민초기였기에 전업화가는 드물었고, 대부분 스튜디오에서 미술학원을 운영하거나 그림공장, 페인트, 만화영화사에서 일하며 자기 그림은 짬짬이 그려야했던 시절이다.

그때 만나고 취재했던 분들, 화단의 1세대 올드타이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안영일 한우식 황하진 박영국 님은 타계하셨고, 김봉태 이익태 심재현 송재광 작가는 한국으로 작업무대를 옮겼다. 그리고 지금까지 타운을 지킨 원로들- 강태호 김소문 유제화 김휘부 선생은 이제 모두 팔순 무렵이지만 아직도 붓을 놓지 않고 있다.

이들 가운데 현혜명(81)은 조금 다른 여정을 걸어왔다. 그는 앞서 언급한 동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엘리트 수업을 받았다. 서울대 미대를 졸업하자마자 어렵기로 유명한 문교부 유학시험을 통과해 1966년 미국으로 건너왔고, 펜실베니아 아카데미 오브 파인 아츠를 졸업한 후 커네티컷의 하트포드 대학에서 미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당시 미국에 와있던 한국작가들은 존 배, 김환기, 한용진, 백남준, 김병기, 안영일 등 손에 꼽을 정도였고 여성은 그보다 훨씬 적었으니, 현혜명은 한국서 일찍이 해외로 나온 선구적인 작가의 한사람이었다.  

“1960년대 유학 와서 무서운 것 없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았다”는 그는 대학 졸업 때 받은 거액의 작품상금으로 혼자 배낭 메고 두 달 동안 유럽을 쏘다녔을 만큼 겁 없고 도전적이었다고 회상한다. 80넘은 나이에도 ‘소녀 같다’는 말을 듣는 지금의 이미지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다.  

하지만 결혼 후 1973년 LA에 정착했을 때 그의 시작은 조용하고 미미했다. 당시 한인화단에서 현혜명은 수채화 화가라고들 했다. 다들 오일 추상화를 그리던 시기였으니 주류에서 빗겨나 있었고, 시몬손 화랑(구 삼일당) 중심으로 모이던 화가들 회동에도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그때 그가 화가이기에 앞서 두 아이의 엄마였다는 사실, “그림이 너무나 그리고 싶은데 애들이 어려서 수채화밖에 그릴 수 없었다”는 사정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같은 시기에 활발하게 활동했던 유제화 박혜숙 조현숙 같은 이들은 엄마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육아로 인한 경력단절은 화가도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행히 또 당연히, 그 시기는 지나갔고 현혜명은 자신의 길 위에 우뚝 올라섰다. 그리고 누구보다 더 많이, 더 열심히, 쉬지 않고 그림으로써 지금까지 가장 오래도록 전성기를 누리는 작가가 되었다. 한인화단뿐 아니라 주류화단에서도, 남가주 만이 아니라 뉴욕과 한국에서도 인정받는 동안 쉴 새 없이 열어온 개인전이 무려 40회가 훌쩍 넘는다. 

현혜명처럼 남녀노소를 초월하여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작가는 흔치 않다. 작가로서 끊임없이 진화하면서도 그림이 한결같이 따뜻하고 맑고 섬세하기 때문이다. 하나도 안 어려우면서도 세련된 그의 작품은 도무지 싫어하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다. 나이 들어도 사라지지 않는 어린아이의 마음, 40년 넘게 데스칸소 가든을 내 집처럼 오가며 체화시킨 풍경이 계절 따라 자연의 색채로 되살아난다. 화폭을 가득 채운 꽃과 나무와 새와 말, 선과 점과 원은 보는 이의 마음에 평화롭게 닻을 내린다. 

그 현혜명 화백이 세 번째 회고전을 연다는 소식에 미술계가 기뻐하고 있다. 그는 2017년 LA ‘아트코어’와 2021년 뉴욕의 ‘원 아트 스페이스’에서 회고전을 가졌으니, 9월14일부터 ‘샤토 갤러리’에서 열리는 이번 ‘축복의 여정’(Blessed Journey) 회고전은 세 번째가 된다. 남들 한번 하기도 힘든 회고전을 다시 또 열게 된 이유는 ‘나누고 싶다’는 작가의 소원이 화단과 콜렉터들의 요구와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제 성공이나 명성 같은 것은 제게 의미가 없습니다. 내일이라도 떠날 준비를 하면서 평생의 삶과 예술을 나누는 일만 남았죠. 이 많은 그림들, 모두 자식같이 귀한 작품들이지만 죽고 나면 어떻게 될까요. 자식들에게 짐이 될 수도 있고 창고에서 먼지만 뒤집어쓰다가 버려질 수도 있겠죠. 자식 입양 보내듯 잘 맞는 가정,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가서 걸리면 그보다 감사한 일이 없겠습니다.” 

회고전 수익금의 일부는 여성들을 돕는 비영리단체들에 기부된다. 불우한 싱글 맘들을 재활시키는 ‘여성회복공동체’(Accompany Worldwide, 대표 이경미), 세계 곳곳에서 여성회복사역을 펼치는 ‘가정의 희망’(Hope For Families, 대표 고경호), 니카라과에서 여성과 아이들을 돕는 ‘엘트란시토 아트센터’(ETCA, 대표 줄리 심)가 수혜단체들이다. 모두 여성이 여성을 돕는 선교단체라는 점에서 이민 1세대 여성작가가 베푸는 회고전은 그 의미가 더 특별하다. 진정한 ‘나눔’이요 ‘축복의 여정’이다.

60년 가까이 변천해온 현혜명의 작품을 초기작부터 신작까지 50여점이나 볼 수 있다. 유명한 시리즈들인 ‘체리 블러섬’ ‘하도’ ‘여정’ ‘숲’ ‘내 마음속의 정원’ ‘조상들의 정원’ 등 자연의 아름다움을 일관되게 노래해온 맑고 투명한 작품들이 모두 걸린다. 매일의 일상을 통과하며 그가 걸어온 신비와 경이, 기쁨과 놀라움이 담긴 그림들이다. 그리고 현혜명이 걸어온 여정은 우리 각 사람이 통과해온 시간과 공간, 그 여정과도 닿아있다.

<정숙희 LA미주본사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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