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자(시인·수필가)
어머니께서 떠나 신지 어언 스무 해가 흘렀는데도 오롯이 마음에 걸리듯 남겨진 말이 생각 난다. ‘너는 네 꿈을 세우고 그 꿈을 이루며 살아가라고’하신 당부 말씀이 음성까지 기억날 만큼 생생하게 떠오른다. 일제 강점기 말엽 부산에서 규모가 제일 컸던 부산 부립 병원 수 간호부로 근무하면서도 서양나라로 유학하시어 대학교수 꿈을 키워가고 계셨는데 독립운동에 몰두하신 외할아버지의 허락을 얻지 못해 어머니의 꿈이 무산된 아픔을 딸에게서 이루고 싶어 하셨던 것 같다. 1940년대의 어머니는 신여성 자리에 있었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으시고 이상향의 꿈을 키워가고 계셨던 것이다. 해서 내 젊은 날, 대학의 또래 동아리 멤버들에게 꿈을 가지라고, 꿈이 없는 자는 젊음을 포기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는 조언을 해왔었다. 또한 국민 학교를 졸업하고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진학을 못한 아이들을 모아 야간 학교가 설립 되고 그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리키면서도 꿈을 가지라고, 먼 미래를 바라볼 줄 아는 눈 뜨임을 강조 하면서 꿈을 가진 자에게 특권이 주어진다고. 꿈은 환경과 사회적 제약을 뛰어넘을 수 있는 힘이 있어 위대한 일을 하게 만드는 잠재력이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었다. 이 배경에는 내 어머님의 조언이 여운의 영향력으로 후세에 까지 남겨지게 된 것이다.
내 아버지께서 살아오시면서 겪으신 인생 여정을 소설로 남기고 싶었다. 장녀의 의무라 다짐하면서 아버지의 출생부터 자수성가하신 수고를 사회로 환원하시는 과정과 군사정권의 탄압으로 끝내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의 한을 글로 풀어 남기고 싶었다. 나름으로 방대한 재료를 수집하고 취재로 모은 자료까지 조목별로 분류를 끝낸 소설 자료들이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미완의 글을 다듬고 떠나야 한다는 멍에를 묵언으로 끌고 다니고 있다. 살아온 연식이 깊어 갈수록 감성도 무디어지고 체력도 하향곡선을 그릴 것이란 군걱정으로, 매주 송고를 해야 하는 칼럼 쓰기에 마음이 좇길 것이란 강박관념으로, 수 많은 밤을 보내면서 노구를 채찍질 해왔다. 또한 머물러 있다는 것과 안주하는 것이 퇴보를 의미하는 것이요 고인물은 썩기 마련이라는 지론을 굳건히 붙들고 살아온 결과물이다. 게으름의 미혹 앞에 나태하지 않아야 한다는 집념이 앞장을 서서 나를 끌고 다녔다. 산수 마루 턱을 넘어서고도 굼틀대는 망념을 잠재우지 못하고 폭죽 같은 열정이 주책스레 서성대고 있다. 현실적 기조나 가능성이 희박한 막역함을 여태껏 버리지 못하고 있는 미련함 이라니. 예나 지금이나 하고 싶은 일이나 읽고 싶은 책이 있거나 하면 잠을 줄여서 라도 해내고 말았던 용트림 같은 열의가 지금의 나를 이끌어온 것일 터이지만 과로로 앰뷸런스를 탑승해 본 후 에야 체력에 정직하자고 수습하듯 가다듬기 시작했다. 체력이 고갈된 상태에 이르러서야 시간이 부족하다는 말을 접을 수 있음은 스스로를 내몰았던 욕심을 인정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어느 분야의 일이든 그 일에 ‘미쳐야’ 좋은 결과물을 탄생시킬 수 있다는 것을 듣고 읽고 보아 왔는데도 줄곧 한계에 미치지 못했기에 이제 꿈을 접을 때가 온 것이라 스스로 매듭을 짓기로 했다. 슬그머니 알아차리지 못하게 슬며시 퇴장할 수 밖에 없음을 마음 속으로 은근히 작정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젊은 날의 서정이 만들어준 신기루였나 보다고, 어차피 기우는 노을처럼, 한 여름 밤의 꿈이었다고 베슬베슬 동떨어져 사위어가는 마음을 인정해주며 접어야 할까 보다. 해가 기울고 하루를 정돈하는 시간이 다가오면 오늘의 너 자신은 어떤 모습이었으며 어떠한 존재감 적립을 했는가, 질의 응답을 다그쳐왔다. 자의식을 일깨워가려는 의지나 열망 없는 일상을 꾸려왔더라면 누구 인가에 의해 외부적인 자극이나 세태의 변화를 겨우 인식하는 수동적 인생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가을이 들어서면 가을처럼 살아가자고 타일러 준다.
자신을 바라보는 관념을 조정해야 하는 과정을 수료해야 함에 소홀치 않기로 했다. 쉽게 만족 하거나 범하기 쉬운 과시를 눌러가며 탁월하지 못한 글 솜씨이지만 세상 사람들의 눈에 띠지 않는 아름다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키워드로 삼으며 온화하고 평화롭게 조곤조곤 나직이 나누어 가며, 화려함보다 소박함으로 두루두루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에 초점을 잃지 않아서, 많이 부족하지만 최선을 쏟으며 노구가 허락하는 시간까지 펜을 놓지 않아야 한다는 다그침이 멈추질 않는다. 셰익스피어 대 문호 작품 ‘한 여름 밤의 꿈’ 의 헤피 엔딩을 기대해 본다.
부족하고 미욱하고 빈틈 많음을 위해 간절한 기도로 기둥 삼으려는 다짐을 기저로 삼으려 한다. 글 쓰기에 임하는 두뇌 조직력이 아직 팽팽하게 유효할지. 기억줄도 조정해 나가야 할 일이다. 노년의 아낙이 여태껏 새로움 추구를 위해 퇴보를 지양해왔던 과욕을 차분한 정리 정돈에 임해야 할 기세로 노구 앞에 우뚝 서 버렸다. 나른한 여름 밤의 꿈으로 끝날 수 없는 옹골찬 다부짐이 엿보이긴 하지만 나이 생각을 하면 한 여름 밤의 꿈이 될 수도 있겠다 싶다. 한 여름 밤의 꿈이 꿈으로 끝나버리는 시나리오일까. 또다른 보람을 창출해낼 꿈을 열어주는 시나리오 일까. 사뭇 궁금해지는 한여름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