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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아침] 벌써

지역뉴스 | | 2024-07-05 08:44:41

행복한 아침, 김정자(시인·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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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자(시인·수필가)   

 

벌써 7월로 접어들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무덥다. 더위에 외출을 조절하시라는 딸네들의 경고음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하지만 노인네들은 여유롭다. 누구든 약속과 다짐을 다 지키지 못하고 살아가는 흐름에 동조하기보다 스스로 출입이 힘들기 때문이다. 날마다 더 푸름으로 옷을 갈아입는 여름이다. 맑은 계곡에 발을 담글 수 있는 적적한 곳, 최소한 휴대폰이 안 터지는 곳이라면 그 어디나 살가울 터이지만 그 마저도 손사례를 칠 형편이다. 고층 아파트라 푸르른 하늘이 가깝고 뭉게구름 흐름도 유유자적이라 에어컨 바람이면 계곡까지는 아니더라도 한여름 이상향이다. 

어느새 벌써 딸네들로부터 걱정을 듣는 나이가 되어 버렸네 싶다. 생의 언덕바지에 오른 시점에 이른 탓인지, 아니면 세월을 느끼는 속도감 때문인지 ‘벌써’라는 말이 남용에 가까울 만큼 잦아진다. 벌써 라는 용어 또한 연륜의 수레바퀴가 만든 역사적 서정이 깃든 나머지, 잉여 정리로 나만의 개인 전용어로 등극했다. ‘벌써’가 ‘이미’로 ‘이미’가 ‘안녕’이 될 날도 예상보다 빠르게 멀지 않을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얼마 전에 하이스쿨로 진학한 것 같은 손자가 벌써 졸업을 하고 9월이면 대학생이 된다. 엊그제 대학에 입학한 것 같은 손녀가 내년이면 벌써 졸업이다. 아침에 양치질을 했는데 벌써 취침 전 양치질을 해야 한다. 벌써 주말이네, 벌써 6월이 가고 7월이 되고, 손주들 생일 카드를 준비하면서도 벌써, 벌써, 소리가 책임감 없는 다변가처럼 심심찮게 오르내린다. 

한 뼘도 되지 않은 것 같은 그 날이 벌써 일년이, 십년이 흘러가고 있다. 주일 이른 아침에나 친교 후에 공동체 젊은 분들로부터 커피에 다과까지 대접을 받곤 한다. 나이든 분들에 대한 사랑이 담겨진 예사 커피와는 다른 진한 사랑을 마시게 되는 것일 게다. 커피잔을 받을 때마다 감사하다고 고맙다는 말을 전하곤 하는데 고마움을 표시하는 인사말 조차 어제 같은데 벌써 한주일이 지난 인사를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다. 더위 탓인지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고 번번히 큐피드 지적을 받는 것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주치의 선생님께 이실직고를 드렸다. 벌써 라는 물음표를 숨겨둔 채. 인지능력 검사를 권하셔서 정신 바짝 차리고 테스트에 응했다. 결과는 만점이었다. 병원을 나서면서 우리집 할배 에게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했다. 테스트에 임하는 긴장감으로 등에 베인 땀을 식힐 겸 만점 축하 퍼레이드를 하기로 했다. 시원하고 달콤한 아이스크림이 쇠잔해진 기억력을 염려했던 마음을 사르르 녹여준다. 

나이란 숫자가 더해 갈수록 기억력은 쇠퇴해 가기 마련 이지만 연륜에서 얻어지는 지혜는 갈수록 넉넉해 질 것이라서 남은 날들의 행보를 미리 내다보며 염려하지 않기로 했다. 삶에 대한 색다른 노하우가 지혜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온 내력 탓에 익숙해 짐을 토대로 타성에 강해지고 삶의 횡포로 하여 내성이 생긴다는 이론에 기대가 크다. 해서인지 이전에 보이지 않던 것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하고 삶과 생각과 행동 지축이 조금씩 자리를 옮겨가고 있다. 인생 자체에 대한 연민이라 할까. 내 것, 내 자리였던 것들을 네 것으로 내 주어야 한다는 선함과 착함을 심령 깊은 곳에서 끌어 올리고 있었 던 것이다. 분명한 것은 나보다 남이 더 도드라지게 부각되고 있다는 것이다.

청명한 푸르름 조차 서러운 세월을 숨기고 그리움도 없어 보일 것 같은 노인네 걸음으로 바스락대며 걸음을 뗄 것이라고 상상조차 하지 않았었는데 벌써 수고로웠던 젊음이 물러나고 정갈하게 나이들어가는 일만 남아있음을 본다. 두 사람이 만나 같은 길을 함께 걷기 시작 했지만 그 길이 어떤 길인지도 모른 채 첫 걸음을 떼어 놓은 것이 은발이 되기까지 이르렀다. 끝 모를 길을 매번 벌써 도착한 느낌으로 이어온 것이었다. 주어진 길이라 여기면서 끝이 보이지 않는, 언제 목적지에 도착할지도 모르는 길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예상 못한 장애물들을 만나, 발목을 잡히기도 하고,  Dead End 에서 돌아서기도 하며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밖에 없는 길을 더듬거리기도 하고, 마라톤처럼 달려 보다가 숨이 차오르면 쉬기도 하면서, 꾸준히 쉼 없이 헤쳐온 길이었다.

돌아보면 탈없이 한참 씩을 잘 달려 주기도 했지만, 어쩌다 삐걱거리는 수레를 손질하느라 멈추기를 간간이 해왔지만 어찌 보면 삐걱대는 것 조차 느끼지 못한 채 쉰일곱해를 밀고 끌고하면서 지금에 이른 것 같다. 쉼 없이 살아온 시간들이 아슴푸레 영상처럼 흘러간다. 세월의 연륜은 어김없이, 끊임없이 수레바퀴를 돌릴 것이다. 지금에 이른 내 나이가 실린 수레 바퀴가 고맙기 그지없다. 오래되고 낡은 수레이긴 하지만 살아오면서 터득한 정비 요령에 기댄 성능으로 쉬엄쉬엄 편안하게 굴러가고 있다. 수레 끌기를 지탱하게 해주는 힘은 근육의 힘도 지식도 열정도 기백도 아닌 선함인 것인데 이미 오래 전에, 예상보다 빠르게 감사가 벌써 앞서서 저 만치다. 원고 퇴고 또한 매일 코앞 목전에서 지키고 서있다. 벌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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