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포스트 한국 독특 문화 집중 조명
대출 힘든 소수계 이민자 사회 중심
신뢰를 기반한 민간 자본 이식 수단
라틴‘탄다’, 흑인‘수수’, 중국‘비아오후위’
70년대와 80년대에 미국으로 건너온 한인 이민자들은 사업을 시작하는 데 여러 어려움이 많았다. 한국에서 가져올 수 있는 자금은 제한됐고 미국 은행으로부터 SBA 융자와 같은 사업 자금 대출을 받는 일은 더더욱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인 이민자들이 미국 전역에 소규모 사업체를 시작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한국 고유의 목돈 마련 수단인 ‘계’(Keh) 덕분이었다고 워싱턴포스트가 분석했다. 워싱턴포스트가 최근 한국의 계 문화를 자세히 소개하며 다른 소수 민족의 비슷한 문화도 함께 알아봤다.
■70, 80년대 한인 이민자 정착에 큰 역할
박계영 UCLA 인류학 교수에 따르면 문서로 확인된 한국의 계 문화는 13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자금 조달 수단이 제한된 농부들이 쌀을 화폐로 계 문화를 주로 사용했다. 한국전쟁으로 경제가 완전히 붕괴한 1953년 계 문화가 다시 성행하기 시작했다.
남성이 돈을 구하러 다니는 것이 체면을 구기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주로 여성들 사이에서 계 문화가 퍼졌다. 1970년대 들어 미국 이민자가 늘었지만 한국 정부가 재산 반출에 제한을 뒀고 미국 은행으로부터 SBA 융자 거절이 늘자, 계를 통해 사업 자금을 마련하는 이민자가 많아졌다.
1979년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워싱턴 D.C. 한인 식료품점 업주의 약 50%가 계를 통해 사업 자금을 마련하는 것으로 조사된 바 있다. 12년 뒤인 1991년 워싱턴포스트는 워싱턴 지역 한인회 추산을 인용해 지역 한인 약 80%가 계를 들고 있다고 보도했다.
다른 대도시의 한인 사회에서도 계 문화가 성행했다. 1987년 시카고 트리뷴지에 따르면 시카고 사우스 사이드 지역 한인 소상공업주 대상 설문조사에서 약 3분의 1이 계를 통해 사업 자금을 마련한 것으로 조사됐다.
한인 이민자들의 유일한 자금 조달 통로였던 계 문화는 1990년대 들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한인 은행이 하나둘씩 문을 열기 시작하고 SBA 융자 등 은행을 통한 대출의 문이 열리면서 한인 커뮤니티는 계를 찾을 필요 없이 사업을 확장해 갔다.
■신뢰 기반 민간 자본 이식 수단
한국의 계가 운영되는 기본 방식은 수 세기 동안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자발적으로 참여한 수십 명의 계원들이 한 달에 한 번씩 일정 금액의 돈을 내고 계를 조직한 계주가 첫째 달 곗돈을 타가는 계의 기본 방식에 큰 변함이 없다.
그런 다음 마지막 계원이 곗돈을 타갈 때까지 나머지 계원들이 매달 같은 금액을 붓고 필요하면 다시 계를 시작하기도 한다. 박 교수에 따르면 미주 한인 이민 사회에서 곗돈 규모는 월 수만 달러에서 100만 달러가 넘을 때도 있다.
투자 관점으로는 계를 이해하기 힘들다. 대신 신뢰를 기반으로 운영되는 민간 자본 이식 수단으로 계를 이해하는 것이 좋다. 간혹 미주 한인 사회에서도 곗돈을 타고 잠적했다는, 이른바 ‘계 파동’ 기사를 접한다. 하지만 한 동네 이웃 간 계를 조직한 예전에는 집안 평판을 중시했기 때문에 곗돈을 받고 도망가는 일이 드물었다.
■대출 힘든 ‘소수계·취약층·신규 이민자’ 위주
이민자 커뮤니티는 여전히 높은 대출 장벽의 한계를 느낀다. 이민자가 겪는 대출 장벽은 인플레이션을 해소하려는 ‘연방준비제도’(Fed)의 통화 긴축 정책으로 인해 더 높아졌다.
특히 높은 이자율로 대출은 꿈도 못 꾸는 이민자가 많다. Fed가 지난해 11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대부분의 은행이 높은 크레딧 점수를 요구하는 등 대출 기준 강화에 나섰는데 소수계 이민자가 느끼는 장벽이 훨씬 크다.
골드만삭스는 지난해 10월 발표한 보고서에서 히스패닉과 흑인 사업주들이 백인 사업주에 비해 대출 시 겪는 어려움이 훨씬 크다고 지적한 바 있다. 특히 신규 이민자와 서류 미비 이민자의 경우 공식적인 경로를 통한 사업 자금 대출이 힘들어 한국의 계와 비슷한 독특한 방식의 자금 조달 수단이나 ‘소액 대출’(Microfinance)에 손을 대야 하는 형편이다.
■라틴계 ‘탄다’ 계 문화와 흡사
라틴 커뮤니티에도 한국의 계와 매우 유사한 ‘탄다’(tanda) 문화가 있다. 미국 내 탄다 문화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없지만 라틴계 이민자들의 사업 성공을 돕는데 탄다가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인정된다. 애리조나 주립대 카를로스 발레즈-이바네즈 인류학 및 국경 연구학 교수는 탄다를 멕시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매우 흔한 문화라고 설명한다.
예로 애리조나와 멕시코 국경 지대에서는 페소와 달러 환율 변동을 활용해 수익을 극대화하는 탄다가 성행하고 있다. 발레즈-이바네즈 교수는 “멕시코인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탄다가 있다”라며 탄다가 라틴 커뮤니티에서 매우 흔하게 자금 조달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가주 샌타클라리타 카운티 휴고 메자 검찰총장은 “예전 한국 농부들이 목돈 마련을 위해 계에 의존했던 것처럼 탄다 역시 신뢰를 바탕으로 운영된다”라고 설명한다.
메자 검찰 총장은 “이민자 사회는 다른 커뮤니티에 비해 서로를 더 많이 의지하는 경향을 보인다”라며 “커뮤니티에서 소외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탄다와 같은 문화가 유지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