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태일(목사)
얼마 전에 이런 글을 읽었다.
“늙으신 아버지를 귀찮아하던 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치매에 걸려 모든 걸 잊어버리셨죠. 항상 똑같은 말만 반복하셨습니다. 어느 날 아들은 병원 벤치에서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옆에 계신 아버지가 나무 위 새를 보시더니 갑자기 물으셨습니다.
“저게 무슨 새니?“ 아들은 힐끗 보고는 대답했습니다. “아버지, 저건 참새예요” 조금 있다가 아버지는 또 물으셨습니다. “저게 무슨 새니?“ 아들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씀드렸잖아요, 참새라고요”라고 말했습니다. 조금 지나 아버지는 계속 눈길이 가는지 다시 한번 물으셨습니다. “저게 무슨 새니?” 아들은 책을 탁 내던지며 소리를 질렀어요. “참새요, 참새라니까요!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으시겠어요!“
아버지는 깜짝 놀란 듯 멍하니 아들을 쳐다보았어요. 그리곤 시선이 아래로 향하더니 더 이상 말이 없으셨습니다. 오래지 않아 기력이 쇠약해진 아버지는 돌아가셨습니다. 아들은 유품을 정리하다가 빛바랜 일기장을 발견했어요. 아버지의 젊은 시절 일기였습니다. 무심코 일기장을 펼쳐보던 아들은 이내 손이 굳었습니다. 일기장에 이렇게 쓰인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3살 된 아들과 공원에 갔다. 참새가 날아오더니 아들 머리 위 나뭇가지에 앉았다. 아들은 천진난만한 얼굴로 물었다. “아빠, 저게 무슨 새에요?” “아들아, 저건 참새란다“ 아들은 흥미진진해 하며 스물 한 번이나 물었다. 나는 한 번, 또 한 번 자상하게 대답해줬다. “우리 아들, 천진하기도 하지! 저건 참새란다” 아들은 웃으며 즐거워했다. 아버지의 낡은 일기장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아들은 얼굴을 가리고 목놓아 울었습니다.”
6.25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 장성 리처드 S. 위트컴은 당시 군수사령관이었다. 1952년 11월27일, 부산역 건너편 판자촌에 큰 불이 났다. 집도 변변히 없어 노숙자에 가까운 생활을 하던 피난민들은 부산역과 인근에 있는 시장 점포 등이 유일한 자리였는데 대화재로 오갈 데가 없게 됐다. 입을 옷은커녕 먹을 것조차 없었다.
이때 위트컴 장군은 군법을 어기고 군수창고를 열어 군용 담요와 군복, 먹을 것을 3만 명의 피난민들에게 나눠주었다. 이 일로 장군은 연방 의회 청문회에 불려갔다. 그리고 의원들의 쏟아지는 질책에 장군은 조용히 말했다.
“우리 미군은 전쟁에서 반드시 이겨야하지만 미군이 주둔하는 곳의 사람들에게 위기가 닥쳤을 때 그들을 돕고 구하는 것 또한 우리의 임무입니다. 주둔지의 민심을 얻지 못하면 우리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고, 이기더라도 훗날 그 승리의 의미는 쇠퇴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하자 의원들은 일제히 기립, 오래도록 박수를 쳤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뒤 장군은 휴전이 되고도 돌아가지 않고, 군수기지가 있던 곳을 이승만 정부에 돌려주면서 “이곳에 반드시 대학을 세워 달라“고 요청하였다. 부산대학이 설립된 배경이다. 그리고 장군은 메리놀 병원을 세웠다. 병원기금 마련을 위해 그는 갓에 도포를 걸치고 이 땅에 기부문화를 조성하기 위해 애썼다. 사람들은 “장군이 체신없이 왜 저러느냐”고 수군댔지만 개의치 않았고 온 마음과 힘을 쏟았다. 전쟁 기간 틈틈이 고아들을 도와온 위트컴 장군은 고아원을 지극 정성으로 운영하던 한묘숙 여사와 결혼했다. 장군이 전쟁고아들의 아버지로 불리는 연유다.
6월을 맞이했다. 6월은 아버지날과 6.25 한국전쟁을 기억하는 달이다. 가정에서 아버지의 역할은 막중하다. 아버지들은 어머니들보다 더 넓고, 높고, 깊고, 큰마음을 가져야 한다.
자랑스러운 아버지들이여! 믿음으로 자신과 가정을 세우고, 이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를 바라고 기도한다. 자녀들이여! 속히 철이 들어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며 따를 수 있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