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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머무는 뜰] 매일매일, 느긋하게

지역뉴스 | | 2026-06-22 10:18:33

삶이 머무는 뜰, 조연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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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연혜 수필가

 

하루를 마무리할 때쯤 종종 아이에게 묻는다. “오늘은 몸의 어느 곳이 가장 힘들었다고 말할까?” 나는 아이의 다리와 입이 되어 대신 투덜거리곤 한다. 발은 종종거리며 사방을 누비느라, 입은 끝없는 수다로 쉴 틈을 주지 않아 고단했노라고.

내 몸은 어떨까? 아마 눈이 가장 많은 불만을 쏟아낼 것이다. “나는 다른 친구들이 잠든 시각에도 쉬지 못해. 네가 새벽이나 한밤중에 영어 공부하고 글을 쓰겠다며 깨어 있잖니?” 주인 잘못 만나 캄캄한 밤까지 중노동을 시키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나도 할 말은 있다. ‘어쩔 수 없어. 낮에 충분히 누리지 못한 내 몫의 시간을 어떤 식으로라도 확보하고 싶거든.’ 

늦어도 새벽 3시면 하루를 시작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육아와 일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면 24시간이 부족했다. 미국에 와 그나마 생긴 틈조차 프리랜서 작업과 영어 공부에 반납했다. 그동안 자리를 내주지 않았던 취미 생활이나 운동과 친해지려 했으나 여전히 난 책상 앞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여기선 안심하고 아이를 맡길 사람이 없어 낮에 뭔가를 하기가 한국에서보다 여의치 않다. 일의 양이 현저히 줄었지만 더 절실히 밤의 자유를 갈망할 수밖에 없다. 아무 방해 없이 오롯이 나를 위해 집중할 수 있는 달빛 아래, 비로소 방치해뒀던 자아가 깨어나는 기분이다.

그래서 노안이 온 건 아니라는 걸 안다. 대부분 40대 초부터 증상이 시작되기에 나 역시 수순을 밟는 것뿐이다. 사실, 아직 돋보기가 필요할 정도도 아니다. 다만 책이나 컴퓨터 화면을 보지 않을 때도 시야가 또렷하지 않고 침침하다는 점이 너무 불편했다. 이 모든 게 올빼미족을 자처한 생활 습관이 나은 결과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뭔가 조치를 취해 눈에 대한 죄책감을 덜고 싶었다. 

“노안 초기세요. 대부분 딱 손님 나이 즈음에 찾아오죠. 한쪽에는 원시도 있네요. 그래서 더 눈이 피곤하고 잘 안 보이는 거예요.” 

급한 대로 찾은 안경점에서 소 잃고 외양간 고치러 간 사람이 들어야 할 말은 예상했던 대로다. 그런데 원시라니,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노안이라는 말보다 더 뜻밖의 소리에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하루 종일 수많은 눈들의 아우성을 듣고 사는 검안사의 반응은 지극히 이성적이었다. 

살짝 심란해하며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증세인지 묻는 내게 그녀는 사무적으로 답할 뿐 공감해줄 의사가 없어 보였다. 그녀는 잘못이 없었다. 손님의 증상을 사실 그대로 설명하는 기본 직무에 충실한 전문가를 누가 나무랄 수 있겠는가. 

“모르죠. 우리 안경점에 처음 오셨고, 전에 쓰던 안경을 가져오신 것도 아니어서요.”

이제라도 안경을 맞춰 눈의 보호하게 된 걸 다행이라 여기는 것밖에는 속상한 맘을 달랠 길이 없었다. ‘눈을 너무 괴롭혀 몸살을 앓는구나. 좀 더 여유를 가지자. 글자 대신 창밖의 우거진 녹음을 자주 바라보자.’ 생각은 참 바람직했다. 그러나 제 버릇은 버리질 못하고 이내 다시 책으로 눈길이 쏠렸다. 조이스 럽의 《느긋하게 걸어라》. 이 책이라면 조바심을 내려놓는 데 좋은 동기 부여가 될 것 같았다. 게다가 오래 동경해오던 산티아고 순례길 위에서 적어 내려간 기록이라니, 그냥 지나치기 힘들었다.

800킬로미터의 고된 길에 나선 수녀의 나이는 예순. 저자의 나이에 한 번 놀라고, 고된 길을 나서며 세운 원칙이 의외로 간결해 또 한 번 놀랐다. 물을 많이 마시고 느긋하게 걷기. 그것은 무리한 강행군으로 생긴 물집 때문에 크게 고생한 그녀의 친구가 한 노인에게서 전해들은 깨달음이기도 했다. 

책으로 산티아고를 걸으며 내 삶의 속도를 점검해보았다. 말도 걸음걸이도 느린 편이지만 실은 나는 느긋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주어진 환경에 상황을 맞추려 하지 않고, 욕심에 한정된 시간을 이리저리 굴리는 잰걸음으로 스스로를 괴롭혔다. 인생의 물집을 자초한 건 다름 아닌 나였다. 조급해하고 염려하면 어디든 탈이 나기 마련, 상처가 곪아 터지는 걸 막는 처방은 한갓진 마음가짐뿐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책을 덮은 며칠 뒤였다. 딸아이가 푹 빠져 읽은 덕에 오랜만에 다시 펼쳐본 《샬롯의 거미줄》에서 더 센 일침을 맞았다. 언젠가 잡아먹힐 거라는 불안감에 떠는 돼지, 윌버. 윌버를 구해주기로 약속하고 그를 안심시키는 거미 샬롯의 한마디는 정확히 내게 하는 충고였다. 

“너는 자신을 추스르도록 노력해야 해. 내가 바라는 건 네가 잠을 푹 자고 걱정을 하지 않는 거야. 조금도 조급해하지 말고 조금도 염려하지 마! … 네가 잠을 잤으면 해. 더 이상 말을 하지도 말고! 눈을 감고 잠을 자!”

분주한 일상에 쉼표를 찍는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그저 잠을 푹 자는 것이었다.

희미한 것을 손 안에 넣어보려 지새운 밤들을 지나 얻은 것은 그리 대단하지 않다. 오히려 스스로를 몰아세우며 몸과 맘을 혹사시킨 조금은 어리석은 날들이었다. 주어진 하루를 바삐 걷지 않고 나를 더 아끼는 것, 자연의 순리에 따라 자고 일어나는 것. 이제라도 이 작고 소중한 삶의 본질을 선명히 보았으니 앞으로 할 일이 눈에 선하다. 

호흡을 한 번 고른다. 그리고 조급함을 비운 자리에 나와 나를 둘러싼 것들을 향한 사랑이 가득 채워질 날들을 기대한다. 조이스 럽의 말대로, ‘매일 매일이 느긋하게 걸어야 할 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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