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
이른 새벽, 카메라를 챙겨 들고 서둘러 집을 나선다. 아직 컴컴한 하늘에는 새벽달이 흐릿하게 걸려 있고, 며칠간 세차게 불었던 바람 탓인지 나뭇가지 위에 막 피어나던 꽃들은 자취를 감춘 뒤다. 목적지는 분지처럼 아늑하게 내려앉은 축구장이 있는 눈데이 파크(Noonday Park). 오래전부터 마음먹었던 길이다. 지난밤 일기예보에는 안개 소식이 없었지만, 왠지 그곳에 가면 새벽안개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기어이 안개를 만나고야 말겠다는 막연한 기대와 예감 하나에 의지해 무작정 차를 달린다. 공원 입구에 도착해 사방을 둘러보니 예감은 보기 좋게 적중해 있다. 언덕 밑으로 길게 뻗은 산책로 끝자락, 넓은 축구장 위로 새벽안개가 하얀 너울처럼 낮게 일렁인다. 사방을 메운 옅은 어둠과 정적 속에 순간 으스스한 한기가 돋아 몸이 움츠러든다. 그러나 신비로운 풍경을 카메라 프레임에 담고 싶다는 마음이 서늘한 두려움을 이겨낸다.
사진기를 꺼내 들고 조심스럽게 산책로를 따라 걸음을 옮긴다. 막상 삼각대를 세우고 셔터를 누르기 시작하지만, 안개의 본연을 포착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사방을 돌아보며 수십 번을 찍고 또 찍어보아도, 유명작가의 화보집에서 보았던 그 몽환적인 자태는 좀체 잡히지 않는다. 더 가까이 다가가면 안개의 속살을 볼 수 있을까 싶어, 안개 속으로 가만히 걸어 들어가 본다.
온통 안개에 휩싸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줄 알았는데, 막상 그 안에 서니 발밑의 푸른 잔디가 오히려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본다. 안개는 어느새 저만치 멀어져 있다. 오히려 조금 전까지 내가 서 있던 산책로가 짙은 안개에 싸여 신비로운 풍경을 자아낸다. 안개는 어쩌면, 멀리서 바라볼 때만 아름다운 존재로 머무는 것일지도 모른다.
문득 사람이 살아가는 일도 이 새벽안개 속을 걷는 것과 참 닮았다는 생각이 스친다. 유명 작가의 멋진 안개 사진에 매료되었던 것처럼, 어쩌면 나 또한 타인의 삶을 부러워하며 그것이 인생의 정답인 양 쫓아온 것은 아닐까. 저 멀리 있는 신기루에 닿으려 스스로를 다그치느라, 정작 지금 내가 딛고 선 발밑의 소박하고 푸른 행복은 보지 못한 채 지나쳐온 것은 아니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생각해보면 그저 한 편의 소박한 사랑 이야기와 따스한 가정을 이룬 것 외에는 세상에 뚜렷하게 내세울 만한 것이 없다. 그래서 나는 아등바등 무엇을 더 움켜쥐려 했던 것일까. 온 힘을 다해 치열하게 살았던 오늘이 눈 깜짝할 사이에 어제가 되어버리듯, 애써 잡으려 하는 거창한 꿈들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소리 없이 바스러지는 안개처럼 저만치 멀어질 뿐인데.
어느새 소나무 숲 너머로 동녘 하늘이 분홍빛 아침노을로 물들기 시작한다. 안개가 걷히면 가려졌던 풍경들이 제 모습을 드러내듯, 삶을 투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지혜의 순간도 내게 찾아오리라 믿는다. 거창한 삶을 성취하지 못했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허물이 되겠는가. 밤새 대지 위에 조용히 고여 있다가, 아침 햇살이 비추면 아무런 미련도 없이 사라지는 새벽안개처럼 사는 것도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침이 완연히 밝아온다. 기대했던 '작품'은 건지지 못한 채 안개는 자취 없이 사라지지만, 그 빈자리에서 나는 삶의 진짜 의미를 받아든다. 여전히 서툰 걸음으로 후회를 남기며 걷는 인생길이겠지만, 사랑할 수 있고 또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 푸른 잔디처럼 내 곁에 존재하기에. 이 세상에 살아 숨 쉰다는 것만으로도 참 행복할 수 있는, 눈부신 아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