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유창 목사 혜존(몽고메리 사랑 한인교회)
바울의 서신 가운데 <가장 위대하고, 가장 강력하고, 가장 깊이 있는 기록>인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 서론에 가장 강력한 표현은 “내게 사랑이 없으면”입니다(고린도전서 13:1-3). 성경 가운데 가장 <사랑>이란 말을 집중적으로 기록한 말씀으로, 현하, <사랑장>이란 닉네임이 붙은 본장에서 소개하는 <사랑의 현실적 존재>를 삶에 적용해봅시다. 만일 이 <세상>에 사랑이 없으면, 내가 살고있는 <나라>에 사랑이 없으면, 내 <직장>에 사랑이 없으면, 더 나아가 내 <가정>에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슬픈 일>입니다.
시인 윤동주는 마태복음 5장 3절~12절의 말씀의 <팔복>을 단 하나의 주제로,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십중팔구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의 말씀으로 <슬픔의 팔복>을 노래했음에 분명합니다(마태복음 5:4). 사도 바울과 시인 윤동주의 <슬픔의 팔복>을 접목하여 우리의 영혼을 조명하는 것은 아주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내게 사랑이 없으면(If I Do Not Have Love)> <슬픈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단호합니다. 방언을 말하고, 예언을 하고,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알고,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단언합니다(고린도전서 13: 1-3).
심지어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 만큼의 극단적인 헌신조차도 사랑이 없으면 유익이 없다고 합니다. 신앙의 외형이 아무리 화려해도, 그 중심에 사랑이 비어 있다면, 그것은 <공허한 메아리(Empty Echo)>에 불과하다는 선언입니다. 그런데, 이 바울의 말은 우리를 불편하게 합니다. 우리는 신앙를 종종 <성과와 열심의 언어>로 증명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봉사했는지, 얼마나 오래 섬겼는지, 얼마나 바르게 살았는지가 <신앙의 잣대(Criterion Of Faith)>가 되곤 합니다.그러나, 바울은 예리하게 묻습니다. “그 모든 것의 심장에 사랑이 있는가?” 만일 없다면, 그것은 성공한 신앙이 아니라, <슬픈 신앙(Sad Faith)>입니다. 예수님은 이 슬픔을 다른 차원으로 이끄십니다. 산상에서 선포하신 <팔복(The Beatitude)>은 세상의 기준을 전복합니다(마태복음 5:3-12).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박해받는 자가 복되다고 하십니다. 특히,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라”는 말씀은, 슬픔 자체를 미화해서가 아니라, <사랑때문에 흘리는 눈물>을 하나님 나라의 언어로 끌어올린 선언입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슬퍼하지 않습니다. <무관심(Apathetic Indifference)>은 눈물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을 그대로 견디지 못합니다. 사랑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그 눈물 때문에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 지점에서 눈물은 기도가 되고, 슬픔은 하나님 나라를 향한 갈망이 됩니다. “사랑 때문에 흘리는 눈물”을 시인 윤동주는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로 표현합니다. 이 말씀은 위로의 문장이 아니라 선언입니다. 사랑이 살아있는 자는 반드시 아파하며, 그 아픔은 하나님 나라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을 증언합니다. 이 선언을 가장 깊이 알아들은 시인이 바로 윤동주입니다. 그의 시 속 슬픔은 <개인적 우울>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견딜 수 없어진 세계 앞에서의 <정직한 떨림>이었습니다. 윤동주는 세상을 미워하지 못했고, 자기 자신을 속이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슬퍼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랑없는 사람은 슬퍼하지 않습니다. 그는 세상과 너무 잘 화해했고, 자기 양심과도 쉽게 타협했습니다. 그러나 윤동주의 슬픔은 타협하지 못한 영혼의 표정이었습니다.
그 눈물은 무력함의 증거가 아니라, 끝내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윤동주의 시에서 눈물은 언제나 말이 됩니다. 그것은 체념의 언어가 아니라, 하늘을 향해 조용히 들려 올려진 기도의 문장입니다. 그래서, 그의 슬픔은 예수님의 선언과 나란히 섭니다. 슬퍼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 나라의 문법을 배운 자의 표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눈물을 <복>이라 부르십니다. 윤동주는 그 복을 시로 증언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남겨진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사랑 때문에 슬퍼할 수 있는가?’ 심장에 사랑이 없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아직 슬퍼할 수 있다면, 그 심장은 하나님 앞에 살아 있습니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내게 사랑이 있는가?” 사랑하는 예수님, 다른 사람들을 볼 때, ‘그들에게서 사랑이 있는가?’를 보기 전에, <내게 사랑이 있는가?>를 먼저 볼 수 있게 하시고, 다른 사람들을 볼 때, 주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아름다운 존재를 볼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