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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우리에게 불행해질 권리는 없다

지역뉴스 | | 2026-02-17 09:37:33

수필, 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우리에게 불행해질 권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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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

 

삶의 귀중함을 뼈저리게 느꼈던 순간이 있었다. '암'이라는 날 선 선고를 받던 그날, 나는 텅 빈 머릿속을 떠다니던 죽음의 공포에 떨었다. 일상은 모래성처럼 허물어졌고 그날 이후 내 이름 앞에는 '암 환자'라는 무거운 수식어가 붙었다. 

수술을 마치고 꿈결처럼 눈을 뜬 회복실, 천장의 흐릿한 형광등 불빛은 마치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내 미래처럼 뿌옇게 번져 있었다. 이어지는 항암 치료는 육체와 영혼을 동시에 갉아먹는 처절한 싸움이었다. 혈관으로 퍼지는 항암제의 이질적인 냄새와 부작용은 내 몸을 너덜너덜한 넝마처럼 만들었다. 만약 '망각'이라는 신의 선물이 없었더라면, 나는 아마 그 지옥 같던 고통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다 스스로 판 절망의 땅굴 속에 숨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죽음의 문턱까지 가보았던 사람은 건강이 당연한 권리가 아니라 거대한 선물이라는 것을 안다. 사랑하는 이들의 온기를 느끼고 그들의 눈을 마주할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비로소 알게 된다. 투병의 긴 터널을 지나는 동안, 내게 남은 시간을 절대로 허투루 보내지 않을 거라고 수없이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 혹독한 고통을 통과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숨을 쉬고 공기를 마시는 것도 행복이라는 이 단순하고 고귀한 진리를 결코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여성 암 환자 모임은 또 다른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암이라는 거대한 파도에 휩쓸렸던 이들이 하나 둘 모여 서로의 손을 잡아주던 그 모임은 분위기부터 남달랐다. 우리 모두는 삶의 벼랑 끝에서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해 본 영혼의 동지들이었다. 처음 보는 사이임에도 우리는 눈빛만으로 서로의 고통을 이해했고, 그 공감은 그 어떤 약보다도 치유의 힘이 강했다. 

그 모임에서 유독 기억에 남는 이가 있었다. 항암 치료로 인해 머리카락이 다 빠지고 낯빛이 창호지 같았던 오십 대 후반의 환우였다. 후 불면 쓰러질 것 같아도 빠짐없이 참석하던 그 모습에서 살려는 의지가 얼마나 큰지 느낄 수 있었기에 위로의 말도 쉽게 건넬 수도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그를 만났다. 거의 이 십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나를 먼저 알아보고 환하게 웃어준 건 놀랍게도 그였다. 

찰나의 순간, 잊혔던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구구절절한 설명이나 형식적인 위로가 필요치 않았다. 그동안의 안부를 묻지 않아도, 건강하게 살아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서로의 행복이 파동처럼 전달되었다. 그는 더 이상 창백한 환자가 아니었고, 나 또한 그때의 내가 아니었다. 우리는 서로를 안아주며, 건강한 삶을 되찾아 살아있다는 지극한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암 투병은 언제 생각해도 숨이 턱 막힐 만큼 시린 기억이다. 하지만 그 병마는 내 영혼을 강하게 단련시켰다. 생의 귀중함을 가르쳤고, 일상의 여유를 되찾게 했으며, 타인의 아픔을 들여다보는 마음을 선물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과거의 나처럼 어둠 속에서 홀로 울고 있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나는 믿는다. 그 어둠의 터널 끝에는 반드시 눈부신 햇살이 기다리고 있으며, 그들 역시 고난을 통과하며 얻은 단단한 지혜로 더 깊은 삶의 맛을 향유하게 될 것임을 말이다.

한동안 암 환우를 위한 걷기대회에 참석했었다. 그곳에서 내 이름은 ‘암 생존자(Cancer Survivor)’다. 맞다. 나는 재앙에서 살아남은 자다. 그 이름표를 달고 5킬로미터의 구간을 걷는 행위는 나에게는 성스러운 의식이었다. 걷기 시작하면 몸은 신기하게도 그 시절의 감각을 본능적으로 기억해냈다. 차가운 항암제 특유의 냄새, 고독하고 두려웠던 시간들, 몸서리쳤던 투병의 기억들이 되살아나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눈물은 슬픔이 아니라 정화의 의식이었다. 

"삶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는 키케로의 말처럼, 죽음의 그림자를 등지고 걸어 나온 사람에게, 남은 생은 단순한 덤이 아니라 온전한 '축복'이다. 고통은 단순한 재앙이 아니라, 삶의 궤도를 수정하게 하는 전환점이다. 그 지독한 경험으로 얻은 깨달음을 삶의 이정표로 삼고 이 눈부신 생의 길을 당당히 걸어야 한다. 희망이 허락된 우리에게 불행해질 권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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