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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머무는 뜰] 우리의 모든 계절은 아름답다

지역뉴스 | | 2026-02-11 10:32:14

삶이 머무는 뜰, 조연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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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연혜

 

한국의 겨울은 꽤나 매서운 편이다. 유난히 추위에 약한 나는 연일 기온이 영하에 머무는 시간들을 반기지 않았다. 가장 정을 주지 않던 계절도 겨울이다. 어쩌다 찬바람이 주춤하고 푹한 날이 이어지면 어른들은 “겨울이 겨울답지가 않다” 하셨지만, 나는 포근하고 좋기만 했다.

계절을 향한 본심을 확인한 건 앨라배마 남부로 이민 오고 나서다. 내가 사는 도시는 대지를 향한 강렬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 햇볕에 서늘한 기운도 힘을 잃고 마는 따뜻한 남쪽 지방이다. 1, 2월에도 얇은 외투 하나면 바깥 활동이 가능한 날들. 두 해 동안 늦가을 끝에 봄을 맞이하는 것 같은 계절의 순환을 겪자 기분이 이상했다. 시간의 징검다리 하나가 소멸된 듯 알 수 없는 허전함이 몰려왔다. 놀랍게도 나는 삼동설한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큰 한파도, 설경도 만나기 힘든 이곳은 감성이 메마른 땅 같았다. 도톰한 코트에 목도리를 칭칭 두르고도 따뜻한 가슴들과 마주하면 온기가 피어오르던 순간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나는 태평양을 건너온 뒤에야 자각했다. 

그래서 지난해 말, 화씨 영화 4도쯤은 되어야 ‘좀 춥다’는 소리가 나오는 캐나다 몬트리올로 여행을 떠났다.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는 곳에 제 발로 간 이유는 그곳엔 낭만이 있을 거란 믿음 하나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칼바람과 눈다운 눈을 맞으며 걷고 싶었다. ‘일주일쯤 머물면 하루는 은빛 가루에 휩싸이는 날을 만날 수 있겠지.’ 별다른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사시사철 따가운 앨라배마의 열기는 잠시 잊고, 이런저런 그리움에 달궈진 심장을 식히고픈 바람이었다.

비행기가 착륙하기 전부터 창문으로 보이는 몬트리올 풍경은 겨울을 상실한 자의 허기를 한순간에 달래주었다. 우리 동네선 필요도 없는 두꺼운 점퍼와 방한 용품을 장만하며 얼음장 같은 냉기에 몸을 맡길 날들을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캐나다 동남부에 위치한 섬 도시는 흰 담요를 덮고 깊은 잠에 빠진 듯 고요했다. 언제 내린 것일까? 길가에 세워둔 자전거, 테라스의 테이블, 계단 난간에 소복이 쌓인 희디흰 결정체가 흐르는 시간을 삼킨 채로 얼어붙어 있었다. 

문득 겨우내 설백의 친구와 동행하는 이곳 주민들에게도 눈은 반가운 존재일지 궁금해졌다. 은세계를 지겨워하거나 교통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여길지도 모를 일이었다. 허나 그렇지 않았다. 내가 묵었던 숙소의 호스트이자 몬트리올 토박이인 프랑스와는 희고 고운 하늘의 축복을 이곳 사람들 모두가 아낀다는 말을 전했다. 

“몬트리올은 보통 11월 말부터 3월까지 새하얗게 뒤덮여요. 우리는 바쁜 일상의 소란함을 잠재우는 눈을 좋아해요. 특히 눈보라가 칠 때면 바람마저 잠잠해지고 눈송이만 소리 없이 떨어지는데, 세상이 얼마나 고요한지 몰라요.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면 모든 게 느리게 흘러가는 기분이에요.”

그렇다고 몬트리올의 겨울이 한산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강풍으로 얼어붙은 빙판길에서도 꿋꿋이 일상을 이어간다. 흰빛이 내려앉은 공원이나 광장에선 꽁꽁 언 맘을 무장해제하고 겨울 야외 활동에 빠져들기도 한다. 

추위를 견뎌야 하는 대상만으로 바라보지 않는 여유가 몸에 밴 사람들이 제 집 드나들 듯 가는 곳은 몬트리올의 심장부에 자리 잡은 산 몽루아얄(Mont-Royal). 그곳은 혹한의 추위를 뚫고 동계 스포츠를 즐기러 나온 사람들의 성지였다. 스케이트나 스키를 타면서 보통 신발을 신었을 때처럼 움직임이 자유롭고, 환호성과 함께 눈썰매를 타며 백색의 치마폭에 쌓인 동토의 정적을 깨우는 이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밝았다. 나른하고 평온한 볕에 감싸인 흰 언덕은 자연이 선물한 거대한 겨울 놀이터 그 자체였다.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사이, 앙상한 나뭇가지마다 피어오른 눈꽃은 핑크빛으로 물들며 성난 추위를 잠재웠다. 

눈과 하나 된 사람들 틈에서 나도 오랜만에 동심을 만끽했다. 서툰 실력으로 스케이트와 썰매를 타는 사이, 모났던 생각들은 동글동글한 산등성이를 닮아가듯 안정을 되찾았다. 순해진 마음으로 해가 기울도록 깨끗한 평원 위에 추억을 새긴 잊지 못할 한나절이었다. ‘인생 앞에 난 길을 뽀득뽀득 순백의 오솔길을 밟듯 걸어가자.’ 하얀 도시를 따스하게 비추는 석양의 붉은 가슴은 무언의 약속을 다짐하는 여행자를 부드럽게 감싸주었다.

순백의 요새 속에서 꿈결 같은 나날을 보내다 현실로 돌아온 날 반긴 건 앨라배마 특유의 포근한 기후였다. 며칠 만에 묵직한 외투를 벗고 가벼운 차림으로 산책하며 ‘답다’라는 말을 곱씹어보았다. 그 존재가 갖춰야 할 성질이나 태도를 나타내는 이 말이 어쩐지 계절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늘 순리를 따르는 자연은 어느 한때라도 ‘답지’ 못한 순간이 없을 테니 말이다. 어떤 계절도, 눈 대신 금빛 햇살이 쏟아지는 겨울도 찬란하고 고귀하다는 걸 다양한 날씨를 경험하며 조금씩 깨달아간다. 

생의 설산을 묵묵히 통과하는 법도 어렴풋이 배우게 되었다. ‘계절이 바뀌는 것은 지구가 기울어졌기 때문이라지만 인생에 폭풍 같은 사건들이 휘몰아치는 이유’는 찾지 못했다는 김연수 작가의 말처럼 삶은 크고 작은 눈보라에 수시로 가로막힌다. 그러나 아무리 척박한 시절을 지날지라도 인생의 사계는 빛바래지 않는다는 걸 이젠 안다. ‘어떤 지난한 순간에도 네 삶엔 낭만이 꽃피고 사랑은 흐려지지 않아.’ 딱 하루, 축복처럼 쏟아지던 함박눈이 내게 건넨 위로가 설원이 되어 뽀얗게 내 맘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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