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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가을엔 바람이 든다

지역뉴스 | | 2025-10-06 11:06:28

수필, 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가을엔 바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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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

 

한국에 사는 지인이 페이스 북에 아주 짧은 글을 올렸다. 제목은 ‘그립다는 말 대신’

“나이가 들어가니 기억력이 떨어지는 걸 실감해요. 연락한 지 오래되어 전화번호가 기억나나 싶어서 안부 메시지 보내 봐요. 잘못 전달된 메시지이면 죄송하지만 무시해주세요.”

세월이 흘러도 감성은 늙지 않는 것일까. ‘그립다’는 말 한 마디에 초로 여인네의 마음이 단번에 꿰였다.

 

까마득히 잊었던 사람들의 안부가 왜 갑자기 궁금해졌을까. 출근길 싸늘해진 코끝 공기에 마음이 헛헛했던 걸까? 환갑을 넘긴 희끗희끗 센머리 남자가 지하철 입구 벤치에 걸터앉아 글을 쓰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앞서 걷던 행인의 뒷모습에서 문득 잊고 있었던 누군가가 떠올랐을까. 아니면 강변 도로 물들어가는 가로수 사이를 지나다가 언뜻 세월의 무상함을 깨달았던 걸까. 

 

가을엔 바람이 든다. 계절이 빛을 바래기 시작할 때면 찾아오는 이 바람의 의미는 무엇일까? 마음을 과거로 달려 보내어 세월을 짚어보게 하는 이 바람. 내 생애 가장 빛났던 어느 한 때 내가 몰입했던 것들을 다시 만나고 싶은 바람. 소중한 줄 모르고 지나쳤던 그 시절 추억 속의 풍경, 장소 그리고 냄새를 따라 달려오는 그 많은 이야기들. 그 기억 속의 나를 다시 한 번 느껴보고 싶은 바람. 바람이 달고 온 추억은 누군가의 얼굴이 오버랩 되며 끝이 나겠지만, 속 바람든 무처럼 먹기도 버리기도 애매한 추억들은 아니니 얼마나 근사했던 내 인생인가. 

 

형광펜으로 밑줄 친 책 속 글귀처럼 빛바랜 잎사귀들이 눈길을 끈다. 가을바람은 남은 세월의 짧음을 생각하게 하는 마력도 있다. 지금부터 얼마나 더 살 수 있을 것인지 생각하면 스스로 놀란다. 인간지사의 거역할 수 없는 순리다. 그래도 살수록 느는 것도 있다. 지나온 생이 밋밋해서 한 서린 사연 하나 없는 것 같아도 추억은 쌓인다. 그래. 가을바람에 공중제비 도는 낙엽 한 장 보면서 떠올릴 얼굴 하나 품지 못했다면 그걸 어찌 인생이라 할 수 있으랴. 떠올리면 졸린 듯 눈이 절로 감기고 입 꼬리가 실룩 웃는 추억이 있으면 후회만 남은 인생은 아니지 않을까? 

 

바람 든 마음 때문인지 빈 속 때문인지 마음이 허하다. 이심전심 바람 든 내 마음이 통하는 친구 누가 없을까. 한동안 아팠던 친구를 불러내서 매콤한 굴 순두부 한 그릇 먹자고 할까. 먼 길 떠난 사람 잊지 못해 웃음기 잃어버린 지인을 불러낼까? 후식으로는 벽난로 멋진 카페에서 생크림 듬뿍 넣은 딸기 크레페에 헤이즐넛 커피 한 잔 나누어야지. 아니야, 어쩌면 따끈한 국화차 한 잔 사 들고서 오후 햇살 숲 그림자 길게 누운 공원 길, 막 물들기 시작하는 잎사귀들을 바라보며 혼자 산책하는 게 더 좋을 지도 몰라. 

 

가을에 바람이 드는 건 나만의 즐거움이다. 그 바람은 결국 나를 향한 것이었으니, 그저 가만히 내 속의 헛헛함을 들여다보자. 그리워하는 마음이든, 짧아지는 세월에 대한 아쉬움이든, 혹은 그저 매콤한 순두부나 달콤한 크레페가 당기는 육체적 허기이든, 이 모든 바람을 탓하지 않기로 하자. 바람이 실어온 기억의 파편들을 주섬주섬 주워 담아 본다. 내가 살아온 날들은 누군가의 안부를 궁금해 하고, 지나간 시절을 애틋하게 여기는 이 가을 바람기로 인해 비로소 완성되는 것일 테니. 어쩌면 인생은 이렇게 바람이 들어야 비로소 근사해지는 것일까? 

 

이제, 나는 벤치에 앉아 바람 든 가을이 지날 때까지, 추억들을 오롯이 즐겨보기로 한다.

 

 

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
김혜경(사랑의 어머니회 회장·아도니스 양로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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