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킬라, 메즈칼, 풀케… 멕시코 전통주의 역사
할리우드 배우 조지 클루니(63)는 2016년부터 2020년까지 영화에 한 편도 출연하지 않았다. 요즘도 별 활동이 없다. 물론 그는 아무것도 안 해도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는 유명 인사이지만 손 놓고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2013년 친구 둘과 함께 출범시킨 테킬라 브랜드 '카사아미고스(Casaamigos·친구들의 집이라는 뜻)'를 운영했다. 그는 "내 취향에 맞는 부드러운 테킬라를 마시고 싶었다"고 의도를 밝혔다.
정녕 그런 의도로 출범시킨 브랜드였을까. 2017년 카사아미고스는 세계 최고 주류 재벌인 디아지오에 10억 달러에 매각됐다. 7억 달러를 일시불로 받고 향후 10년 동안 매출에 따라 3억 달러를 더 받는 조건이었다. 즉석 캡슐커피인 네스프레소의 인지도를 단숨에 끌어올린 데서 보여주었듯, 여러모로 그의 브랜드 가치를 보여준 방증이었다.
■미국 연예인, 술 브랜드 론칭
미국의 연예인들이 술, 특히 도수가 높은 리큐어 브랜드를 설립하는 건 이제 유행을 지나 경향으로 자리 잡았다. 영화 ‘데드풀과 울버린'의 데드풀 역인 라이언 레이놀즈도 그렇다. 엄밀히 따지자면 캐나다 출신인 그는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의 ‘아비에이션 아메리칸 진'의 지분을 사들였다.
이 브랜드가 디아지오에 팔린 뒤에도 광고에 출연하는 등 운영에 관여하고 있다. 최근 영국의 렉섬 라거 맥주 또한 인수해 세계 진출을 시도하고 있다.
연예인들의 관심이 특히 멕시코의 전통주에 집중되고 있는 현상은 눈여겨볼 만하다. 궁지에 몰리고 생활고에 시달려 마약 제조업자로 돌변한 고등 화학교사의 이야기를 담은 미국 드라마 ‘브레이킹 배드'의 주인공 브라이언 크랜스톤이 있다. 그는 함께 출연한 에런 폴과 2019년 ‘도스 옴브레스(Dos Hombres·두 남자)'의 지분을 매입했다. 도스 옴브레스는 멕시코의 전통주 메즈칼 브랜드다.
테킬라는 그래도 우리에게 친숙한 편이다. 최근까지 고급 주류의 이미지를 누리지는 못했다. 파티용 독주로서 대강 만들어도 마실 만한 칵테일 ‘마르가리타'나 ‘테킬라 샷'으로 소비되고는 했다. 소금을 손등에 얹고 핥은 뒤 짠맛이 퍼질 때 테킬라를 그야말로 ‘원샷'을 하고 라임즙을 빨아 먹는다. 한마디로 테킬라는 저렴하게 들이켜는 술이라는 멍에를 오래 짊어졌다.
이제는 입지가 사뭇 다르다. 클루니의 성공 사례가 입증하듯 테킬라는 음미하는 술로 격상됐다. 대강 섞어 만드는 마르가리타보다 더 많은 칵테일에 정교하게 쓰이고 있으며, 위스키처럼 세월을 들여 숙성시킨 제품도 애주가들의 선택을 받는다. 그런 테킬라의 입지를 등에 업고 느낌이 사뭇 다른 메즈칼 또한 마니아 취향에서 벗어나 저변을 상당히 넓혔다.
■유통기한 고작 사흘인 '풀케'
그런데 잠깐, 메즈칼은 또 뭐 하는 술인가 의문을 품을 수 있다. 메즈칼은 아직도 입지를 넓히고 있는 리큐어이므로 우리에게는 다소 낯설다. 흥미로운 점은 이 두 가지 술을 포함한 세 가지의 멕시코 전통주가 같은 재료로 빚어진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들 셋이 함께 밀고 당기면서 멕시코 전통주의 르네상스를 이끌고 있다.
이 세 가지 술은 모두 멕시코 선인장인 아가베, 즉 용설란으로 빚는다. 가공 방식에 따라 결이 각각 다른 술로 완성된다. 멕시코 전통주를 논한다면 테킬라나 메즈칼보다 풀케(Pulque)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 용설란의 잎을 쳐내고 한가운데의 심에 구멍을 파면 수액이 고인다. 이를 하루에 두 번씩 퍼내 발효시키면 풀케가 된다.
알코올 도수 평균 40도 수준인 증류주 테킬라, 메즈칼과 달리 발효만 시킨 풀케의 도수는 2~7도로 맥주 수준이다. 한편 뿌연 미색에 걸쭉함과 적당한 신맛을 지녀 막걸리와도 비슷하다. 아가베의 일종인 마궤(Maguey)가 원료인 풀케는 테킬라와 메즈칼의 조상이다. 기초적인 발효로만 빚는 저도수 술이므로 풀케의 역사는 2,000년을 웃돌 거라 추측된다. 12년 이상 자란 마궤만이 풀케를 발효시킬 수 있는 수액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풀케는 멕시코의 독립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해 전성기를 누리다가 곧 정책적 억압 탓에 내리막길을 걸었다. 멕시코 혁명 직후인 20세기 초 정부 차원에서 풀케를 저소득층의 수준 낮은 술로 매도하는 한편 맥주를 대체품으로 밀었다.
전통 양조법을 고수하는 소규모 생산자들에 의해 풀케의 명맥이 유지됐고, 최근 조금씩 다시 알려지기 시작했다. 특히 젊은 세대에게 풀케가 멋진 술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숨통이 트이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 막걸리와 흡사해 병입한 뒤에도 계속 발효되면서 점차 도수가 높아지고 신맛이 강해진다. 그 탓에 장거리 유통이 쉽지 않은 게 풀케의 약점이다. 캔에 담아 팔기도 하지만 유통기한이 고작 사흘이다.
■술병에 벌레 넣는 '메즈칼'
멕시코 전통주 역사를 잇는 다음 술은 메즈칼이다. 술의 도수를 높이려면 가열과 응축을 통한 증류가 필요한데, 필리핀과 교역을 시작한 1565년 이후 해당 기술이 멕시코에 유입됐다고 추측된다. 따라서 메즈칼의 역사는 최장 500년 정도로 볼 수 있다. 역시 용설란의 수액으로 빚는 메즈칼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심을 일단 굽는다는 점이다. 이파리와 뿌리를 쳐내고 남은 심을 큰 구덩이에 한데 모아 불을 붙이고 흙으로 덮는다.
그렇게 사흘을 구워낸 심을 압착해 뽑아낸 수액을 발효시킨 뒤 진흙이나 구리 단지에 담아 증류하면 메즈칼이 완성된다. 대체로 두 번의 증류를 거쳐 37.5도에서 55도까지 알코올 도수를 올린다. 메즈칼은 병입 시 용설란에 번식하는 나방 번데기를 집어넣는 경우가 흔한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맛을 불어넣는다고도 하고 마시기 안전하다는 방증이라고도 한다. 그냥 홍보 전략이라는 의견도 있다.
원료를 불에 구워 특유의 훈연향이 배이므로 메즈칼은 테킬라보다 호불호가 갈리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기는 날로 높아지고 있는데 멕시코에서는 ‘스트레이트'로, 즉 그냥 마시는 게 일반적이다. 테킬라와 비슷하게 썬 오렌지와 튀긴 번데기 가루, 고춧가루, 소금을 함께 곁들여서도 마신다. 반면 멕시코 바깥에서는 칵테일, 특히 올드패션드나 네그로니 같은 고전 칵테일의 바탕술로 활발히 쓰인다.
■청색 용설란 '테킬라'
인지도는 가장 높지만 멕시코 전통주 가운데서는 막내인 테킬라는 사실 도시의 이름이다. 멕시코에서도 중부라 할 수 있는 과달라하라주에서 65㎞ 떨어진 지역이다. 붉은 화산질 토양 덕분에 원료인 청색 용설란이 잘 자라는데, 특유의 향과 단맛을 지니고 있으며 2006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선정됐다.
메즈칼보다 테킬라가 더 나중에 탄생한 이유로는 입지로 인한 증류 기술 전파의 시차가 꼽힌다. 앞서 언급했듯 필리핀과의 교역에서 전파된 증류 기술이 해안 지역을 거쳐 멕시코의 중심부이자 내륙 지방으로 퍼졌을 거라는 논리다. 그리하여 대략 18세기 중반이 돼서야 테킬라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멕시코가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시절 국왕 카를로스 4세가 쿠에르보 가문에 테킬라 양조의 첫 법적 면허를 수여했다. 그의 성이 낯익다면 아무래도 가장 유명한 테킬라 브랜드인 '호세 쿠에르보'의 시조이기 때문이다. 테킬라도 메즈칼과 흡사하게 용설란의 심을 익힌 뒤 수액을 추출한다. 다만 오븐에 굽기 때문에 훈연향이 배어들지는 않으니 붙임성이 좋아 대중적이다.
테킬라나 메즈칼은 대체로 무색 투명하지만 이는 '블랑코(흰색)'라 불리는, 숙성을 시키지 않은 것이다. 위스키 같은 다른 리큐어처럼 두 가지 술 또한 나무 술통에서 숙성시키면 세월이 지나면서 색이 진해진다. 숙성을 오래 시키면 '레포사도'(2개월 이상)를 거쳐 '아네호'(1년 이상)가 된다. 숙성을 오래 시킬수록 칵테일에 쓰기보다 그대로 음미하기 좋은 술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