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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의 시선] 채식주의자·소년이 온다·작별하지 않는다

지역뉴스 | | 2024-10-16 11:01:24

정숙희의 시선, LA미주본사 논설위원,채식주의자,소년이 온다,작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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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전해진 날로부터 며칠 동안 그의 소설 5권을 연달아 읽었다. 책방에 전화해보니 남아있는 책이 없어서 친구에게 빌리기도 하고 이북을 다운받았다. 

‘채식주의자’는 2016년 부커상 수상 때 읽었지만 내용이 전혀 생각나지 않아 다시 읽었다. 사실 좋았는지 싫었는지조차 인상에 남아있지 않은데, 그 말은 재미없었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서점 주인의 말도 그동안 한강의 책 좋아하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니, 분명히 대중적이지는 않았던 작가다. 하지만 이젠 좋든 싫든 세계적으로 어마어마한 대중적 인기를 끌게 되었고, 나 역시 여러 책들을 집중해서 읽고 나니 작가의 저력과 함께 그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정신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처음 한강(54)의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는 놀라움과 감격 사이로 “왜 한강일까?”하는 의문을 가졌던 것이 솔직한 마음이다. 우리나라에 훌륭한 문인이 얼마나 많은데…하는, 아마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나 뿐만은 아닐 것이다. 

그동안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돼온 한국의 대표 작가들은 시인 고은(91)과 김혜순(69), 소설가 황석영(81)이 있다. 한동안 노벨상 발표 때가 되면 고은 시인의 집 앞에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매번 민망함이 잇달았다. 그에 비하면 한강은 올해 후보에 오른 것도 몰라서 언론이 초칠 겨를 없이 뉴스가 터진 게 오히려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황석영은 ‘해질 무렵’과 ‘철도원 삼대’로 영국 최고권위의 부커상 후보에 두 번 올랐고, 김혜순은 시집 ‘날개 환상통’으로 지난 3월 한국작가 최초로 미국도서비평가협회(NBCC) 시부문 상을 받았다. 이들 외에 ‘저주토끼’의 정보라, ‘고래’의 천명관, ‘대도시의 사랑법’의 박상영이 부커상 후보에 올랐던 작가들이다. 이 가운데 천명관은 개인적으로 무척이나 좋아해서 작년 6월 LA한국문화원에서 주최한 북 토크에도 다녀왔을 만큼 팬심을 갖고 있다. 

이들에 비해 한강의 소설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 한 문장마다 멈춰서 생각을 조율해야할 만큼 고요하고 사이사이 여운이 있다. 스웨덴 한림원은 선정이유로 “역사적 트라우마를 직시하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하고 시적인 산문을 선보였다”고 밝혔는데 ‘시적 산문’이란 표현이 바로 이 응결된 문장의 아름다움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유일하게 쑥쑥 읽히는 책이 ‘소년이 온다’(2014)이지만, 잘 알려져 있듯 5.18 광주항쟁에 관한 책이라 그 잔혹함 때문에 감정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읽기 힘들기로는 제주 4.3 사건을 다룬 ‘작별하지 않는다’(2021)도 마찬가지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육신의 고통, 마음의 고통, 영혼의 고통을 찌른다. 두 소설은 한국현대사의 깊은 상흔을 정면응시 했다는 점에서 짝을 이루지만 ‘작별하지 않는다’가 그 아픔을 은유적, 몽환적 시선으로 풀어냈다면 ‘소년이 온다’는 직접적, 체험적으로 서술한다.

한편 ‘흰’(2016)은 거의 시집이라 해도 좋을 명상집이다. 인간의 어둠을 탐색하던 한강이 돌아서서 밝고 눈부시고 더럽혀지지 않는 인간의 투명함에 대해 쓴 책, 흰색 사물에 관한 일련의 짧은 메모와도 같다. ‘희랍어 시간’(2011)은 말을 잃어버린 여성과 시력을 잃어가는 고대그리스어 선생의 관계를 통해 소통과 언어의 상실이 인간 존재에 미치는 영향을 절제된 단어들로 이야기한다. 

한강의 작품은 대체로 춥고 어둡고 내밀하며 감성적이다. 눈, 바람, 폭설, 나무, 밤, 달, 그림자 같은 단어와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 소설이지만 시적인 문체, 민족의 비극을 다루지만 개인성에 초점을 맞춘 서사, 환상과 현실이 교차하는 내러티브, 슬픔과 트라우마 즉 ‘한’을 문학으로 승화시킨 힘이 노벨상 수상의 중요한 이유가 됐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모든 작품에서 인간의 폭력성과 상처를 탐구해온 작가는 “인간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가, 인간은 무엇이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다. 어쩌면 영원히 풀리지 않을 질문이다. 

많은 한국의 언론이 이야기하듯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무엇보다 번역의 힘이 컸다. 정말 좋은 책들도 번역되지 않으면 누가 알겠는가? 특별히 한강에게는 아주 훌륭한 번역 팀이 있었다. 노벨상 수상에 앞서 부커상(‘채식주의자’)과 메디치상(‘작별하지 않는다’)이 디딤돌 역할을 했는데 이것은 훌륭한 번역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다양성’(Diversity)이 중요해진 21세기 문화예술계 트렌드와 무관하지 않다. 백인, 남성, 서구 위주이던 주류문학이 소수계와 여성에 주목하기 시작했고, 노벨 심사위원회도 2010년 이후 성별 안배를 고려하여 매년 남녀를 번갈아 선정해왔다. 아울러 그동안 아시안 여성 수상자가 한 명도 없었던 점, 일본과 중국에서는 남성작가가 수상했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한편 10년 전 한강이 ‘사상적 편향성’ 때문에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포함되었었고, 한국인 최초로 부커상 수상이 발표되었을 때 박근혜 정부가 축전 보내기를 거부했다는 사실이 새삼 화제가 되고 있다. 그 블랙리스트에는 봉준호, 박찬욱, 황동혁 감독도 포함돼있었다고 한다. 이들이 훗날 오스카상, 칸영화제 감독상, 에미상,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을 때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관리해온 박근혜 최순실 김기천 조윤선은 어떤 심정이었을지 궁금하다.  

한강은 최근 “겨울에서 여름, 나아가 봄으로 들어가고 싶다. 역사적 소설은 그만 쓰고 좀 더 개인적인, 생명에 대한 소설을 쓰려고 한다”고 말했다. 노벨상 이후의 한강이 궁금해진다.            

 <정숙희 LA미주본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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