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자(시인·수필가)
어둠 속으로 빗소리가 쏟아지고 창밖으로 후드득후드득 빗소리가 들린다. 새벽녘 빗소리에 잠이 깨면서 소리에 대한 여러 잔상들이 떠오른다. 소리의 일상에 몰입되면서 글 짜임새가 만들어지지 시작했다. 물체의 진동에 의해 생긴 음파가 고막을 울리어 귀에 들리는 것을 음성 기호로 생각이나 느낌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행위와 그 결과물을 소리로 정의했다. 자연이 만들어내는 소리, 가락이나 사람의 고함이나 목소리가 소리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겠다. 소리를 소재로 다루는 글인데 시(詩)로 비상하기 직전의 초고를 다듬어 보았다. 언제나 줄곧 이른 아침 창을 통해 들려오는 바람소리가 하루를 깨운다. 연이어 자동차 소리가 잠에서 덜 깬 의식을 일깨우고 비몽사몽 꿈 나라에서 벗어나도록 일으켜 세워준다. 물 소리, 설거지 소리에 전화벨 소리까지 일상의 첫 시간이 빚어내는 모든 소리는 우리로 하여금 맑은 하루를 열어갈 수 있도록 호흡을 열어 들이쉬고 내쉬는 조화의 안배를 도모 해준다. 에너지 광합성 원리에 맞추어 이산화탄소를 배출시키며 내호흡과 외호흡을 규모 있게 호흡 교환율에 기식할 수 있도록 보살펴 준다. 사물을 헤아리고 판단하는 생각, 일이나 사람에 대한 기억이며 관심분야에 미치는 상황이며 분위기 느낌까지, 이 모두가 하루를 이끌어내기 위한 소리의 초석이다. 살아있기에 발생하는 삶의 소리이자 동선의 소리들로 움직임이 유발해낸 소리들의 일상이다. 소리에 버금가는 침묵도 낮은 호흡으로 세상을 지켜 보고있다. 한낱 들풀도 하루가 다르게 소리를 낮추는 것은 빛이 바래고 있는 까닭일 것이다.
봄이 숲을 찾았을 땐 겨우내 실 날 같은 목숨 부지하느라 가녀린 소리 조차 힘들었는데 메마르고 건조했던 계절 구석구석에 물기가 스며들고, 심연으로부터 목숨 줄 부지할 자양분 빨아 들이는 소리로 하여 영혼이 흡족해 하는, 비로소 평안을 누리는 소리로 가득 했던 봄날 소리의 굴곡이 엊그제 같은데. 여름이 가을로 접어드는 길목에 소리의 일상이 엮어놓은 다리가 놓여졌다. 푸름을 지켜내느라 고요했던 숲이 가을 소리를 내기 시작하더니 바람이 휘젓고 지나가는 자리마다 조락하는 나뭇잎들이 우수수 몰려다닌다. 숲은 어디에나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기다리고 있다. 귀를 기울여 물소리에 숨을 죽이다 보면 먼 음악 소리 같기도 하고 타협 없는 엄격하고 엄중한 가르침 같기도 하다. 도란도란 개울 물이 잇따라 흘러가는 동안 물방울이 분해되고 부딪히기도 하고 비명을 질러 대며 한꺼번에 몰려들면 흡사 폭포를 연상케 하는 소리의 조합이 드세고 경쾌하다.
낮은 데로 흘러가며 쉼 없이 들려주는 물소리는 울퉁불퉁한 마음을 다듬어 주기도 하고 자연이 풀어내는 소리 중 으뜸으로 평안을 안겨준다. 아이처럼 무구한 겸손으로 낮아지거라, 아이처럼 때 묻음 없는 순진함으로 사랑하거라, 물소리에 심취 하노라면 아이처럼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진다. 종일토록 이어지는 맑은 영혼의 기도소리요 찬양 소리일 수밖에 없음은 소리의 일상이 놓아준 다리가 세상과 자연을 이어주었기 때문이리라. 모든 소리가 일상의 근원이요 세상은 소리로 하여 일상이 유발 되고 소리가 세상을 이끌어 가고, 만상을 주도해 가는 바탕의 근거가 되어 주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목소리가 커야 이긴다고 하지만, 입을 닫고 소리를 삼키며, 입을 다물고 말을 아끼는 편이 이기는 세상이 왔으면 좋을 것 같은데 세상은 어느 쪽도 두둔하지 않기로 한 것 마냥 재간대로 살아가라는 눈빛이다. 생명이 보전되는 주변에는 부산스럽지만 행복한 소리가 머물러 있고 기쁨이 충만하게 윙윙 대고 있다. 소리는 저희들 끼리 고요를 만들기도 하고 향기로운 소리로 바꾸어 내기도 한다.
소리의 일상은 오랜 곰삭음을 거치며 말갛게 여과된 필요한 것만 골라서 꺼내 놓을 줄도 안다. 숱한 축적이 쌓인 소리, 소리의 발효에서 달관과 초월의 경지를 통해 들려오는 초탈을 발견하게도 된다. 아침 햇살의 빛 부신 반사를 내뿜고 있는 실개천이 맑고 진지한 찰나의 고요가 눈부시다. 빛이 가끔씩은 소리를 내며 들어서기도 한다. 소리가 빛을 업고 다닐 때면 빛줄기가 스며드는 곳마다 소리가 들린다. 빛이 소리와 어우러지며 찾아 들기에 빛이 머무는 곳이면 소리가 난다. 푸르던 잎사귀에 잎맥이 도드라지기 시작하면 단풍으로 물들어가는 소리를 내고, 열매를 거둔 자리에는 겨울나기를 대비하는 소리가 들리고, 밤나무에 밤이 여물면 밤송이를 밀어내는 소리가 들린다. 가을 꽃들이 꽃잎을 열면 향기가 내미는 미세한 소리로 은근히 제 이름을 알려주는 모양새다. 귀뚜라미 소리가 자지러지면 기적 소리는 점점 멀어지듯 들려올 것이다.
소리를 내는 것들은 공기를 찢으며 대기에 상처를 내기도 하고 때로는 영혼의 상처를 미화기키는 일에도 심취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말았으면 싶다. 심령마다 다가와서 음파의 흐름이듯 영혼 깊은 곳에 살아갈 힘을 새겨 주기를 당부 드리고 싶다. 풀벌레 소리가 그립다. 자동차 소음과 가랑잎을 청소하는 송풍기 소리, 신축 공사장 기계음에 익숙해져 버린 가을이지만 어디선가 정겨운 풀벌레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다. 별똥별이 긴 여운을 남기는 밤인데 만상이 깨어나느라 기지개 켜는 소리로 들리기도 한다. 나부끼는 바람소리, 흐르는 물소리,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 가을이 익어가는 소리들이 소리의 일상을 키워가는 것일 게다. 가을 소리가 자박자박 젖어 들고 있는데 소리의 일상도 제 소리에 겨워 몸을 적시고, 세상도 소리에 겨워 정결함과 진지함에 허기져 있지만 빛살이 물방울을 만나 무지개가 생성되듯 세상 소리가 자연 소리와 만나 소리의 무지개를 만들었으면 하고 소리의 일상이 무지개 꿈에 취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소리의 무지개가 그려낸 악보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