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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의 세상읽기] 빵과 장미

지역뉴스 | 외부 칼럼 | 2022-03-18 08:25:59

권정희의 세상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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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  

 

우크라이나 전쟁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다. 러시아 침공으로 불바다가 된 고향을 뒤로 하고 피난행렬이 이어진다. 아빠는 고국에 남아 참전하고 아이들은 엄마 손 잡고 피난길에 오른다. 맑디맑은 눈망울들이 가슴을 찌른다.

 

정확히 110년 전 미국에서도 어린이들이 피난을 간 적이 있었다. ‘어린이 대이동’이다. 전쟁은 아니고 1912년 ‘로렌스 파업’의 여파였다. 매서추세츠, 로렌스는 전형적인 멜팅팟이었다. 51개국 출신 이민자들이 복작복작 모여 살았다. 도시화와 산업화가 대규모 이민물결과 맞물리던 당시, 이민자들은 산업노동력의 최하위층을 차지했다. 여성은 그중에서도 바닥, 남성 임금의 절반을 채 못 받았다. 로렌스의 방직공장, 봉제공장들은 이민여성과 미성년자들을 값싸게 고용해 마구잡이로 혹사했다.

 

열악한 근무환경, 터무니없이 낮은 임금을 참아내던 여성노동자들이 폭발한 것은 1월 11일 오후였다. 주급 봉투를 보니 32센트가 덜 들어있었다. 주법으로 여성과 어린이 근무시간을 주 56시간에서 54시간으로 단축하자 공장주들이 임금을 깎았다. 평균 주급 8달러 76센트에서 32센트는 한끼를 먹느냐 굶느냐를 가르는 큰 액수. 여성노동자들은 파업을 결심했다. 일하나 파업하나 굶기는 마찬가지란 생각이었다. 그때 이들 여성 시위대의 구호가 “우리는 빵을 원한다, 그리고 장미도”였다. 빵은 생존을 위한 생활임금, 장미는 품위를 갖춘 삶. 여성운동을 지지하던 제임스 오펜하임의 시 ‘빵과 장미’를 인용했다.

 

주 민병대가 총검을 겨누고 경찰이 무력진압하면서 수백명이 체포되고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이들은 굴하지 않았다. 하지만 도시가 전쟁터나 다름없이 위험해지자 아이들을 그대로 둘 수가 없었다. 파업하던 엄마들은 수백명 아이들을 기차에 태워 맨해튼으로, 필라델피아로 탈출시켰고, 그곳에서는 파업 지지자들이 아이들을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파업은 혹한 속에 9주간 계속되고, 3월 14일 1만5,000명 노동자들이 모인 가운데 임금 15% 인상, 오버타임 지급 등 요구조건들을 관철해냈다. 미국 노동운동 사상 이정표적 승리로 기록된 ‘빵과 장미 파업’이다.

 

세기가 바뀐 지금, 여성들의 처지는 분명 나아졌다. 참정권을 가졌고 60년대~70년대까지 당연시되던 많은 성차별에서 벗어났다. 여성 혼자 이름으로 은행구좌를 개설할 수 없고, 남성보증인 서명 없이는 신용카드를 발급받지 못하며, 임신하면 바로 해고되는 등의 부당함은 과거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남녀는 평등한 걸까.

 

금년 3월 15일은 미국에서 ‘동일임금의 날(Equal Pay Day)’이었다. 말 그대로 남성과 여성의 임금이 같아지는 날, 그렇다고 남녀 임금이 동일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풀타임 기준, 남성이 지난 1년 벌어들인 임금과 동일하게 벌려면 여성은 해를 넘기고 얼마나 더 오래 일해야 하는 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날이다.

 

일단 ‘3월 15일’은 1996년 ‘동일임금의 날’이 만들어진 이래 가장 이른 날이다. 2021년 한해 남성이 번만큼 버는데 여성은 해를 넘긴 후 단 74일 더 일하면 되었다. 임금격차는 남성이 1달러 벌 때 여성 83센트. 지난해 ‘동일임금의 날’이 3월 23일(남성 1달러 대비 여성 82센트)이었으니 8일이 당겨졌다.

 

그럼에도 답답한 것은 ‘동일임금’이 실현되려면 앞으로 수십년이 걸린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10월 여성정책연구소 보고서는 풀타임 근로자들의 성별 임금격차가 완전히 사라지는 때를 2059년으로 추정했다.

 

달러 당 몇 센트 차이가 만들어내는 손실은 엄청나다. 여성이 40년 풀타임으로 일하면서 성별 임금차별로 인해 덜 받는 액수는 40만 달러 이상. 20살부터 풀타임으로 일할 경우, 남성이 60살까지 버는 만큼 벌려면 여성은 72살까지 일해야 한다. 임금격차는 소셜 연금 격차로 이어진다. 2020년 브루킹스 연구소 보고서에 의하면 여성이 받는 평균 소셜시큐리티 연금은 남성의 80%에 불과하다. 전국임금균등위원회가 ‘동일임금의 날’이면 빨간 복장을 권하는 이유이다. 여성들의 적자인생을 환기시키자는 것이다.

 

남성보다 능력이 탁월하고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받는 여성들이 늘고 있지만, 아직은 소수이다. 대다수 여성들은 구조적 성차별과 뿌리 깊은 차별관행으로 취업, 임금, 승진에서 불공정 대우를 받는다. 초급대학 졸업한 남성이 평생 버는 돈을 벌려면 여성은 석사학위가 필요하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소매업체, 학교, 병원 등 여성들이 많이 일하는 직종의 보수가 상대적으로 낮은 것도 성별 임금격차의 한 요인이 된다.

 

남녀 임금격차가 해소되면 여성 빈곤율은 절반으로 줄고 GDP(국내 총생산)는 3% 증가한다고 한다. 남성 직업, 여성 직업으로 가르는 성별 직업분리를 멈추고, 육아 유급휴가와 재취업 보장 등으로 여성들의 육아부담을 덜어주는 법적 지원이 시급하다.

 

“우리가 행진, 행진하면 위대한 날들이 온다네/ 여성이 우뚝 선다는 건 인류가 우뚝 서는 것 … 삶의 영광들, 빵과 장미, 빵과 장미를 함께 나누네”

 

성차별이 사라지면 여성만 좋은 게 아니다. 여성의 가족이, 가족 중의 남성이, 그래서 모두가 행복해진다. 우리는 연결된 존재들, 다함께 행복해지는 길은 평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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