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도 한국 언론들이 전하는 뉴스는 온통 MBC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MBC 여기자 출신 어느 인사가 한국방송통신위원장으로 임명 강행 됐는데 이는 정권후반기 MBC를 장악하기 위한 윤석열 정부의 계획이었다느니, 그래서 MBC는 9월 중에 큰 소용돌이에 빠지게 될 것이라느니, 하는 흉흉한 소식입니다.
문뜩 80년 여름에 내가 겪었던 언론인 대학살의 기억이 떠올라 안타까워하고 있는 사이 미국 서부로 부터 다른 비보가 전해왔습니다. MBC 라디오 제작국장과 보도제작국장을 지내신 김준철 선배님의 부음입니다. 평생 MBC를 그토록 사랑하셨던 선배님이 하필이면 MBC가 큰 곤경에 처한 이런 때 가시다니…
만난 사람은 언젠가 헤어지기 마련이라고 하지만 서부에서 멀리 동부로 옮겨와 살다가 가까운 분의 부음을 들으면 가슴이 메어집니다. 선배님은 4년 전에 45년 간 사시던 남가주를 떠나 따님이 사는 북가주로 가신 뒤 남다른 효도를 받으며 건강도 회복되고 편안하게 계신다는 소식을 종종 듣고 있었습니다.
선배님에게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이 따릅니다. 1961년 12월에 방송을 시작한 MBC 라디오의 개국요원으로 스카우트돼 방송에서 처음으로 PD 기능을 시작하셨고 방송국이 세들어있던 인사동 가구점 한 모퉁이에 라디오 생활정보센터를 만들어 라디오의 동시성과 생활정보기능을 개척한 공로가 남다릅니다.
장인숙 선배님을 만나 아나운서 부부가 되신 선배님은 텔레비전 개국준비요원으로 발탁돼 영국의 톰슨 텔레비전 칼리지에서 수학하신 뒤 1969년 8월에 개국한 MBC 텔레비전에서 최초의 모닝쇼 앵커로 활약하셨습니다. 그러다가 1975년 초대 MBC 미주지사장으로 발령받아 로스앤젤레스에 오셔서는 한국 방송의 미주 보급에 선구자적 역할을 하셨습니다.
이 무렵 한국에서는 80년 5월 전두환 군부가 광주에서 야만적인 참극을 벌여놓고는 이에 대한 보도를 못하게 하자 MBC를 비롯한 모든 언론사 중견기자 와 PD들이 검열과 제작거부 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그해 7월 주동자 급 언론인들을 대량 해직시키는 만행이 벌어져 MBC에서만 78명에 달했습니다.
이들에게는 국내 취업마저 금지돼 MBC 해직동료가운데 8명이나 식솔을 이끌고 정처없이 미국으로 건너왔습니다. 이때 김준철 선배님이 후배 이민자들을 당신의 일처럼 아파하시고 따뜻하게 맞이해 주셨던 일을 잊지 못합니다. 그런 선배님이 다음주 북가주 로스 알토스의 한 가톨릭묘지에서 영면하시게 됩니다.
선배님, 그곳에서도 그토록 사랑하셨던 MBC와 MBC 후배들이 큰 어려움 겪지 않게 지켜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바라기로는 권력자들이 그 무서운 탐욕의 멍에를 벗어 버리고 바른 길로 나오기를 원합니다. 여권 성향의 어느 신문 칼럼이 지적한 것처럼 제발 ‘백성들을 바보로 여기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89 평생을 뜨겁게 사시다가 뜨거운 8월에 떠나시는 선배님, 그러나 우리는 그 여름만이 아니라 따스한 봄날에도, 바람 부는 가을에도 그리고 적막한 겨울날에도 선배님과 함께 했던 날들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잊지 않으면 이별은 없다고 했습니다. 선배님과는 이별을 하지 않았습니다.
<김용현 뉴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