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유창 목사 혜존(몽고메리 사랑 한인교회)
길 위의 인생. 이것은 우리 모두의 <사실적 자화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길을 찾아 헤매는 안타까운 모습 또한 우리의 슬픈 현실입니다. 그 이유는 모순의 관점에서만 바라보기 때문에 찾아오는 결과입니다. 창과 방패가 분명히 모순의 원흉인 것처럼 오해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장 조화로운 창의력이 그 속에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은 마치 모순관계처럼 서로 부조화되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이 둘 관계가 <순종>과 <풍요>의 이상적인 조화와 창의력의 완전한 결합체임을 아직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3장에서 장차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셔야 함을 예고하는 순간, <베드로, 도마,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마음에 상흔을 입히고 가장 실망시킨 눈에 띄게 예수님을 향하여 <배신>의 정체를 드러낸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직접적인 언급은 이 사실을 증명해주는 결정적인 근거입니다.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요 13:21).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요 13:38). 이런 배신의 징후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더욱더 절실하게 정체성의 길을 걷게 만들었습니다.
배신의 정반대는 신뢰입니다. 이 당연한 상식조차 상실한 제자들을 향하여, 그리고 우리 시대의 모든 공범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하나님을 믿으라. 그리고 또 나를 믿으라”(요 14:1). 이것은 순종과 풍요의 길을 극단적인 직설법으로 묘사하신 예수님의 <지혜와 총명의 메시지>입니다.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로 넘치게 하사”(엡 1:8). 지혜는 모든 신령한 지혜를 의미함과 동시에 <길 위의 길,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깨닫게 하는 영적 분별력을 의미합니다(골 1:9). 총명은 <순종과 풍요>가 예수님 안에 있음을 알게 하는 영민함을 의미합니다. 현하,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에게나 우리 시대의 우리 모두에게 동일하게 절실한 것은 <순종>과 <풍요>를 말씀 그대로 신뢰하고 따를 때입니다. 머리로만 순종하고 실제 삶에서는 여전히 이기심과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어리석음 때문에 <순종>과 <풍요>의 관계가 상생의 관계, 조화와 창의력의 본질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 1인칭 시점의 직설법은 영적 무지몽매함이 극에 치달아 있을 때, 예수님께서 사용하시는 <최고 처방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길 이심을 백 퍼센트 절감하는 신앙의 경지에 도달하려면 <자기부인>의 정직하고 진실한 모습을 갖출 때입니다. 길 위를 평생 걸어가면서도 예수님이 길 되심을 늘 자각하지 못하는 슬픈 현실은 마태복음 16:24절의 말씀을 곁눈질에만 그치고 말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