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패권 경쟁이 점입가경이다. 미국이 서방을 비롯한 동맹 국가들과 협공해 중국을 무릎 꿇게 하려 애쓰고 있지만 중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온몸으로 맞서고 있다. 외려 때릴수록 더 강하게 맞받아치는 형국이다.
기자는 중국에서 여러 분야의 전문가를 만날 기회가 많은데 그때마다 국적을 가리지 않고 미국과의 경쟁에서 중국이 승리할 수 있을지를 묻고는 한다. 최근 한 일본인의 답변은 흥미로웠다. 그는 “중국이 이길 것이라고 보장하기는 힘들지만 쉽게 지지는 않을 것”이라며 “과거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처절하게 반성하며 과거를 곱씹는 중국만의 특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맞장구를 쳤다. 적어도 기자가 만난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얻은 교훈을 소중히 여긴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중국이 미국과의 패권 경쟁에 집착하는 것은 러시아·일본이 패권국 미국의 지위를 넘봤다가 처절하게 패배했던 역사를 목격했기 때문이다. 이번에 밀리면 영원히 세계 최강국으로 올라설 수 없음을 알기에 절대로 지지 않겠다는 각오로 맞서는 것이다.
이런 면모는 통화 정책에서도 나타난다. 중국은 ‘달러 패권’이 미국을 강국 반열에 올려놓고 지금까지 그 지위를 유지시켜왔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플라자합의를 통해 엔화 가치가 폭락하고 일본이 몰락한 것 역시 인지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중국은 중앙은행디지털화폐(CBDC)가 자리 잡을 경우에 대비해 10년 전부터 ‘디지털 위안화’ 개발에 박차를 가하며 ‘통화 패권’을 쥐기 위한 작업을 진행해왔다.
한 발 더 나아가 상당수 중국인들은 자신들이 청나라 시절 세계의 리더를 자부했던 만큼 현재 미국이 누리는 패권국 지위는 자신들이 넘겨준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런 관점에서 중국에 가장 뼈아픈 역사를 꼽는다면 많은 중국인들이 한목소리로 아편전쟁을 지목한다.
중국 최초의 통일왕국으로 현재 신중국의 기틀을 마련하며 세계 최강국으로 발돋움하던 청나라는 아편전쟁을 계기로 몰락했다. 이후 150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야 중국은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주요 2개국(G2) 반열에 올라섰다. 그동안 만났던 중국인 관료 상당수는 “아편전쟁만 없었다면 지금 세계는 미국이 아닌 중국이 호령하고 있을 것”이라며 안타까움을 드러낸다.
중국 관점에서 미중 패권 경쟁은 원래 자리를 되찾기 위한 수순일 뿐 미국에 도전하는 것이 아닌 셈이다. 이달 11일 중국 외교부 초청으로 쓰촨성 청두 선수핑기지로 향하던 길에 원촨션커우중학교 지진유적지에 들렀다. 2008년 5월12일 진도 8.0의 쓰촨성 대지진이 발생했던 곳이다. 당시 오후 첫 수업이 진행되던 교실 안 수많은 학생들과 교사들은 비극을 피하지 못했다. 중국은 무너졌던 건물과 기숙사들을 당시 모습 그대로 보전했다. 지진 피해의 아픔을 잊지 않기 위해 유적지로 만든 것이다.
중국인에게 아픔은 단지 잊고 싶거나 그저 기억해야할 역사 속 한 페이지가 아니다. 과거의 아픔을 발판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힘의 원천이 된다는 점에서 어쩌면 중국이 미국과의 패권 경쟁에서 쉽사리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김광수 서울경제 베이징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