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서울에 나갔을 때 고교동창 8명과 점심을 먹었다. 팔순이 낼모레인 할아버지들이었다. 꼴찌로 식당에 도착한 녀석이 지팡이를 짚고 쩔뚝거리며 들어왔다. 좌골신경통이란다. 방송기자로 30여년을 뛰어다니며 건각(健脚)을 자랑했던 친구다. 식사 후 한 친구와 근처 여의도공원을 처음으로 산책하면서 나도 평생 기자였지만 아직 지팡이를 짚을 때는 안됐다고 자위했다.
지난주 옛 사우와 오랜만에 통화했다. 목소리가 여전히 카랑카랑했다. 편집국 요직을 일찌감치 두루 거쳤고 은퇴 후에도 커뮤니티에서 정력적으로 활동하며 한인이민사, 독립운동사, 한반도통일문제 등에 관해 수십 권의 책을 쓴 노익장 언론인이다. 뜻밖에도 그는 요즘 허리와 다리 통증이 너무 심해 방안에서 꼼짝 못한다며 부득이 외출할 때는 지팡이를 짚고 나선다고 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팔순을 넘긴 후 팔다리 힘이 놀랄 정도로 약해졌다. 지난 3월 아내와 함께 동네 마켓에 갔다가 주차장 칸막이 블록에 발이 걸려 개구리처럼 나동그래졌다. 예전처럼 잽싸게 균형을 잡을 수가 없었다. 얼굴과 손에 작은 생채기가 나고 안경도 땅에 떨어져 유리 하나가 빠졌다. 낯선 쇼핑객이 친절하게 상처에 반창고를 붙여줬다. 고마웠지만 참으로 서글펐다.
하지만 나만 서글픈 건 아니다. 미국에선 매년 65세 이상 노인 4명 중 1명이 넘어진다. 캘리포니아주에서만 지난 2020년 144만명이 낙상했다. 전체 65세 이상 노인의 27%에 해당한다. 비가 자주 오는 워싱턴주에선 31%, 빙판길이 많은 알래스카주에선 38%가 넘어졌다. 전국적으로 한해 300여만명이 넘어져서 병원 응급실에 실려 오고 그 중 100만여명이 입원치료를 받는다.
한국 상황도 미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65세 이상 노인들 중 거의 16%가 연간 두 번 이상 낙상사고를 겪으며 이들 중 65%가 입원치료를 받는다. 입원환자들 중 여자가 남자보다 3배나 많다. 골다공증이 여성 중에 더 흔하기 때문이다. 전체 입원환자 중 과반수가 2주 이상 치료받는다. 두드러진 낙상이유는 ‘미그러져서’(26.4%)와 ‘다리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아서’(20.1%)이다.
젊은이와 달리 노인 낙상사고는 흔히 골절, 뇌진탕 등 무서운 후유증을 유발해 죽음을 재촉한다. 가볍게 넘어져도 뼈가 부스러지기 일쑤다. 2020년 캘리포니아에서만 2,347명이 낙상사고로 숨졌다. 노인 10만명당 43명꼴이다. 특히 엉덩이와 넓적다리를 연결하는 고관절 뼈가 깨진 낙상환자들은 사고 후 1년 안에 5명 중 1명꼴로 사망한다고 연방 질병예방센터(CDC)가 경고했다.
뼈가 부러져 누워만 지내면 신체기능이 급격하게 퇴보한다. 근육이 줄어들고 욕창이 생기며 심폐기능이 떨어져 폐렴 같은 질병에 쉽게 감염된다. 폐렴으로 죽는 노인이 많은 이유다. 한번 넘어지면 또 넘어질까봐 안 움직이려 들고 그에 따라 신체기능이 더 약화돼 결과적으로 더 잘 넘어지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넘어지는 날이 죽는 날”이라는 노인들의 경구가 괜한 말이 아니다.
지팡이를 짚으면 낙상사고를 줄일 수 있다. 힘 빠진 두 다리를 보완해주는 제3의 다리다. 전문가들은 한눈팔거나 주머니에 손 넣고 걷지 말 것, 욕조 벽에 손잡이 대를 설치할 것, 미끄럼방지 신발을 신을 것 등과 함께 지팡이를 짚을 것을 예방책으로 꼭 권고한다. 하지만 노인들은 십중팔구 지팡이를 마다한다. 내 장모님도 생전에 그랬었다. 시쳇말로 “쪽 팔린다”고 생각한다.
동갑내기 조 바이든 대통령을 볼 때마다 아슬아슬하다. 그가 비행기 트랩에서 내려올 때 다리가 휘청거려 보인다. TV에 지팡이를 짚은 모습이 비춰지면 표가 떨어진다고 생각할 터이다. 하지만 그러다가 넘어지면 아예 끝장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휠체어에 앉아서도 4선을 연임했다. 그나저나, 나도 다음에 서울에 나갈 때는 지팡이를 짚고 친구들을 만날 것 같아 씁쓸하다.
<윤여춘 전 시애틀지사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