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유창 목사 혜존(몽고메리 사랑 한인교회)
루이스(C.S. Lewis)는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에 대하여, “하나님은 분별력이 별로 없는 사람들을 봐주시는 분이지만 모든 사람이 자기에게 있는 분별력을 사용하기 바라신다. ‘착하고 상냥한 종이 되고, 영리할 수 있다면 그렇게 되라’가 아니라, ‘착하고 상냥한 종이 되라. 그뿐 아니라 네가 할 수 있는 한 영리해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라’는 것이 적절한 모토다. 하나님은 어떤 일이든 엉성하게 하는 자를 싫어하듯이 지적으로 태만한 자도 싫어하신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생각한다면 경고하건대, 당신의 두뇌를 비롯해 모든 것을 쏟아 부어야 할 그 무엇을 시작하고 있음을 잊지 말라……그리스도인이 되는데 특별한 교육이 필요없는 이유는 기독교가 교육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이천 년 전에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순전한 기독교의 실체의 본을 보일 것을 명령하셨
습니다(마태복음 10:16). 바꾸어 말하면, 이것은 온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순종과 풍요>의 영적 훈련으로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 신앙의 전략임과 동시에 영혼의 계율입니다. 비둘기는 순결을 상징하고, 뱀은 지혜를 상징하는 비유의 명령인데 어떻게 비둘기의 순결함을 결부하여 생각할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제시한 이유는 신중하고 분별력이 있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뱀은 간교하고 신중한 동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창 3:1).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뱀을 지혜의 상징적 동물로 지목하신 까닭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기 때문입니다(렘 17:9). 지혜를 영적 통찰력으로 음미하면 <신중한 분별력>과 동일한 의미로 바꾸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뱀의 외양이 혐오스럽긴 하지만 위험에 대처하는 뱀의 영민함은 신속하고 교묘하게 빠져나가는 것이 그 장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뱀 같이 지혜로와라!”고 말씀하신 목적은 생명을 노리고 쫓아오는 원수들의 계교에서 지혜롭게 벗어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요 10:12,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지향하는 바람직한 삶은 “반석 위의 삶”입니다. “반석 위의 삶”은 분명 좋은 생활양식이어야 합니다. 삶 가운데 가장 매력적인 삶은 당연 <무너지지 않는 풍요>의 삶일 것입니다. 이 <풍요>의 삶을 터득한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의 롤 모델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뱀 같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평행의 삶, 균형의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분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삶의 균형을 깨뜨리고 삶의 에너지를 빼앗아가는 원흉이 분명 있습니다. 그 원흉의 실체는 마음의 분노, 시기, 정욕, 탐심입니다. 이 원흉들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자 하는 선한 마음을 간사하게 가로막는 악한 마음입니다.
정반대로 <칭찬받을 필요에 대한 무관심>, <싫어하거나 정죄하는 사람들 앞에서 모욕과 충격에 휩싸이지 않는 초연함>, <저주와 속임수, 당면한 현실 속에서 당하는 구타하는 자에 대한 그리스도의 마음>, <달려들며 침 뱉는 자에 대한 너그러운 관용>은 구체적인 “뱀 같은 지혜”입니다. 바로 그 순간 그리스도인의 내면의 사고와 감정의 모든 실체는 “비둘기같이 순결함”을 풍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나라에서 천국의 순종은 천국의 풍요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뱀 같이 지혜로와야 함과 비둘기 같이 순결해야 함은 서로의 별개의 상반된 것이 아닙니다. 지혜가 어긋난 길로 나가게 되면 교만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지혜와 순결함의 조화를 강조하신 것입니다. 억울하게 하는 자들을 오히려 축복하고, 왼쪽 뺨을 때리면 오히려 오른쪽 뺨을 돌려대는 그리스도의 관용이 <순종과 풍요>의 실체입니다. 바로 그순간, 영혼의 내면에서는 <능력과 평안과 사랑>의 풍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예수님의 지엄하신 말씀에 대한 순종은 곧 천국의 풍요로 가는 첩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