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유창 목사 혜존(몽고메리 사랑 한인교회)
프랜시스 톰슨의 시, <하나님 나라>는 우리에게 풍성한 고독이 무엇인지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 보이지 않는 세계여/우리는 그대를 보노라/오, 만질 수 없는 세계여/ 우리는 그대를 만지노라/ 오, 알 수 없는 세계여/ 우리는 그대를 아노라/ 붙잡을 수 없는 세계여/ 우리가 그대를 붙잡노라/ 물고기가 대양을 찾으러/ 위로 솟아오르겠으며/ 독수리가 창공을 찾으러/ 아래로 뛰어 내리랴?/ 우리가 그대의 소문을 들은 적이 있느냐고/ 저 움직이는 별들에게 물어보랴?/ 저 회전하는 천체가 어두워지는 곳도/ 우리의 마비된 생각이 솟아오르는 곳도 아니니!/ 우리는 날개짓 소리에 귀 기울이니/ 우리의 흙덧문을 두드리는 그 소리로다/…../하지만 (그대가 더 이상 슬플 수 없을만큼 슬픔에 빠졌을 때)/ 울부짖어라 – 그대의 뼈아픈 고통과 함께/ 야곱의 사다리에서 오가는 모습 밝게 빛나리/ 하늘과 채링크로스가 사이에 걸친 그 사다리 위로.”
프랜시스 톰슨은 <야곱의 참혹한 고독의 상황>을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고독>에 빗대어 노래하였습니다. 인생무상한 인생의 마지막을 가장 잘 묘사한 전도서 기자 솔로몬의 인생 아이러니도 시인 프랜시스 톰슨의 노래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 12:7-8). 인생의 허무함을 통해서도 깨달아 알 수 있는 <하나님 나라>는 <풍성한 고독>이 그 속에서 역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우슈비츠 감옥의 가스실에서 유태인들이 산화해가고 있었을 때, 당시 독일의 살아있는 양심의 상징인 본회퍼는 그의 풍성한 고독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습니다. “기독교인 특히 목회자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과 함께 어울리려면 항상 무언가 이바지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것이 [섬김]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하는 것보다 경청하는 것이 더 큰 섬김이 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본회퍼는 우리가 하나님과 풍성한 삶을 누릴 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줄곧 강조했습니다. <풍성한 고독(Affluent Solitude)>은 <풍성한 공동체(Affluent Community)>를 세웁니다. 그는 여기에 대한 선명한 획을 그었습니다. “자기 형제의 말에 더 이상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곧이어 하나님의 말씀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될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도 재잘재잘 지껄이기만 할 것이다. 이로써 영적 생명의 죽음이 시작될 것이며, 결국에는 경건한 말들로 치장된 목사의 공치사와 영적인 잡담만 남게 된다.”
본회퍼의 <풍성한 고독>은 용광로와 같은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 <경청>과 <사랑>의 아주 밀접한 관계를 친히 삶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이 시대의 가장 치명적인 결점은 <경청>과 <사랑>의 절묘함이 <풍성한 고독>에서 나옴을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고 허허실실의 의미심장한 진리를 발견한 전도자의 고독에서 나옴을 귀을 열어 귀기울이는 겸손에 있음을 백안시한다는 것입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경청>을 토대로 한 <풍성한 고독>이 지금 우리에게 절실함을 시대를 앞질러서 예언하였습니다. “세상에는 상대방이 할 말을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귀를 절반만 열어놓고 듣는 사람도 있다. 그것은 <조급하고 부주의한 태도>이며, <형제를 멸시하고>, <자기의 말할 기회>를 얻어 다른 사람을 제거하기만을 기다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