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최고의 변증가 C.S.루이스의 저서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는 고참 마귀가 신입 마귀에게 전수하는 ‘인간을 유혹하는 전략’을 편지형식으로 기술한 것이다. 인간사의 다양한 일들을 마귀의 시각으로 조명한 루이스의 뛰어난 통찰력이 담겨있다. 고난에 대한 해석도 흥미롭다.
경험이 없는 신입 마귀가 고난을 통해 인간을 괴롭히려고 할 때, 노련한 고참 마귀는 성공을 향해 달리는 사람들에게 절대 고난을 주지 말라고 충고한다. 인간을 망하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쉬지 않고 일하며 성공의 푯대를 향해 달려가게 하는 것이라고. 달리는 말에서 떨어지면 주위를 돌아보고 자기의 방향성을 확인할 것이기에 그런 기회를 주지 말라고. 고난이 바로 그런 기회가 된다고…
그 말이 옳다. 지난 2년여 뇌종양 치병의 여정은 나에게 배움과 성장의 기회였다. 갑자기 덮친 위기 속에서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동안, 강도 높은 ‘인생 강좌’를 수강하는 것 같았다. 일상이 평온하고 형통할 때는 미처 몰랐던 인생의 다른 면들이 보였다. 삶이 내 뜻대로 안되고 통제 불가능한 상황이 내 앞을 막아서면, 낯선 나의 모습이 드러난다. 좌절, 분노, 절망의 감정이 거친 비바람처럼 스스로를 후려친다. 견뎌내지 못할 것 같던 폭풍의 끝자락에 이를 때 즈음, 격하게 저항하던 자아의 힘이 빠지고 마음이 낮아지면서 현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놀라운 것은 그렇게 낯선 현실에 적응하고 나면 그 안에서 새로운 일상이 형성되고 그 일상을 통해 기쁨, 기대, 감사의 감정들이 재생된다는 것이다. 이전의 일상과 새로운 일상의 가치 비교는 무의미해지고 어떤 상황에서도 삶은 여전히 소중한 선물임을 깨닫게 된다.
인생은 형통한 날들과 곤고한 날들로 어우러져있다. 형통함을 고집하고 곤고함을 거부하는 것은 삶의 본질과 어긋나는 것이다. 마치 씨줄과 날줄이 교대로 엮어져 천이 되듯, 인생이 베를 짜는 길쌈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행히 형통한 날들이 아쉬움을 남기며 속히 지나가듯, 영원할 것 같은 곤고한 날들도 오래 버티진 못한다. 위기의 순간들을 딛고 나의 내면이 더 단단하게 발돋움할 것을 기대하며, 눈치 없이 찾아오는 불청객 같은 고난을 애써 반겨본다.
<박주리 GMS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