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유창 목사 혜존(몽고메리 사랑 한인교회)
예수님의 신적 존재와 인간의 육신적인 존재는 언제나 <대립과 상충의 관계>를 면치 못하는 것이 <율법선생, 니고데모>와 <예수님>과의 만남과 대화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접근법이 천양지차의 간격을 역력하게 보임으로써 이미 입증되었습니다(요한복음 3장). 이에 대하여 개혁신학의 선구자, 달라스 윌러드는 <마음의 혁신>을 주창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모든 거짓 정보를 정면으로 부인한다. 복음은 하나님을 떠난 삶을 구성하는 모든 이미지와 개념을 무력화시킨다”고 하면서 그의 명저, “하나님의 모략(The Divine Conspiracy)”에서 신랄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위에서> 난다는 하나님의 실체를 ‘문자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으로만 인식하였기에 예수님은 그가 초인적 생명을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영적 무지를 꾸짖으셨다”고 준엄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에 비해서 시편 43편을 기록한 시인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생명의 복음>은 시편기자의 찬양과 고백을 더욱 더 진솔하고 간절하게 묵상하게 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에 대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로다.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시 43:1–5). 니고데모와 시편 43편에 나타난 복음의 하나님의 특별 계시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수직적인 관계형성이 왜곡되거나 잘못된 접근방법으로 시작에 오류가 발생하면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임을 역력하게 잘 보여줍니다.
그래서 복음이 제대로 영적 효력을 발휘하려면 우리의 <신앙적 사고>가 시편기자처럼 건강하고 진솔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소위 그리스도인들이 지향해야 할 올바른 사고일까? 도대체 사고란 무엇인가? <사고는 곧 생명입니다. 사고는 곧 영입니다. 사고는 곧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내 안에 있는 하나님, 나를 향하여 부르시는 하나님을 제대로 수직과 수평의 영적 관계형성을 할 때 그 열매가 신실하게 맺히는 것이라는 것을 시편 43편은 담담하게 신앙 고백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시 43:5)
냉철하면서 정직한 사고를 한 우리 영혼의 스승 바울은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1–32). <마음의 개혁>을 하나님 면전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항상 분명하고 바르게 행동으로 실천하며 혼탁한 시대, 변질된 교부시대에 당당하게 서 있었던 마르틴 루터는 단호하게 복음적 사고의 정의를 내립니다.
“성경과 분명한 이성이 내 잘못을 지적하지 않는 한, 상호모순을 보여온 교황들과 공의회들의 권위를 나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 양심은 하나님 말씀의 포로다. 나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고 철회하지 않을 것이다. 양심을 거스르는 것은 옳지도 않고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 바로 예수님의 “위에서”의 사고와 바르게 접목한 사고는 마음의 개혁, 참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펼치며 겸손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게 합니다.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시 4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