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유창 목사 혜존(몽고메리 사랑 한인교회)
<용감한 사랑(Courageous Love)>은 고난 앞에서 그 <진면목(True Character)>이 나타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민낯은 아직도 용감한 사랑에 대해서 <비겁하고 소심함>이 그 본질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성경에서 <가장 지혜롭고 용감한 사랑>을 한 실례를 신구약의 대표적인 두 인물을 찾는다면 당연히 <고난의 대명사, 욥>과 "찔림과 상함과, 징계받으심과 채찍에 맞으심"을 통하여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고통의 대명사인 <십자가의 예수님>입니다(이사야 53장 5절). 욥기의 결론에 해당하는 욥기 42장 중에서도 백미에 해당하는 본문은 욥기 42:10입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이 용감한 사랑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리고 있습니다. "용감한 사랑은 환난 중에서도 굳세게 서 있으며 악마의 간교한 변론에 귀 기울이지 않고 환난의 때에라도 영화의 때와 같이 하나님께 항상 진실하도다(빌립보서 4:12,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워 항상 진실하도다"). 현하, 예수님과 욥은 실로 <용감한 사랑>의 산 표본(Role Model)입니다. 욥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인사불능의 열악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용감한 사랑의 고백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욥기 1장 21절입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참으로 용감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고난 받으신 예수님, <십자가의 길, 비아 돌로로사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이 그 비아 돌로로사의 마지막 고난의 언덕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까지 단 한 순간도 그 십자가를 버리시거나 비겁하거나 소심하게 그 지고지순한 용감한 사랑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일관하셨던 것입니다.
용감한 사랑의 대명사,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외치신 일곱 마디의 절규 가운데 소위 가상칠언의 최고 임계점의 말씀은 사복음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중에 오직 요한복음에만 그 구체적인 기록이 나온 "다 이루었다!"입니다(요한복음 19:30). 예수님에게 주어진 최고의 미션,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의 대서사시는 그 상황이 종료되었다고 예수님 스스로 선포하셨습니다(요한복음 19:30).
예수님과 욥이 보여준 용감한 사랑은 다메섹 길 위에서 예수님을 만난 바울의 고백과 동일합니다. 고난을 피하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정면돌파로 일관한 바울은 '고난과 맞서 싸우라!' 고난 앞에서 움츠려 들거나 그 고난을 피하지 말고 당당하게 "선한 용사와 같이 싸우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딤전 6:12, 딤후 4:7).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하나님의 은혜의 때에 욥의 고난을 하나님께서 끝을 내리셨습니다. 장사 지낸지 사흘 만에 예수님의 고난을 생명의 부활로 대전환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만천하에 선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자비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베드로전서 1:3).
욥의 끈기있는 인내와 예수님의 사랑으로 일관하신 고난의 공통점은 그 고난이 사탄의 간교한 계략에 의해서 시작되고 하나님의 자비로 끝났다는 것입니다. <용감한 사랑>은 우리들 자신의 궁핍한 영혼으로 인하여 그 허약함이 앞으로 앞으로 위로 위로 나아가고자 하는 우리의 발목을 잡는 일이 설령 발생한다 할지라도 그보다 더 큰 용기와 힘을 가지고 헛된 만족과 거짓에서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용감한 사랑(Courageous Love)>은 예수님과 욥이 보여준 것처럼 간교한 사탄 앞에서 당당하고 어떤 유혹 앞에서도 섣불리 뒤로 물러서지 않는 담대함 입니다. 용감한 사랑의 완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한복음 16장 33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