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자(시인·수필가)
66.25 사변 정전 협정 이후 7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당시 국민학교 2학년으로 가슴에서 코 손수건을 겨우 떼어내고 학교생활 초년생 시절을 마냥 유쾌하고 즐겁게 보내고 있었던 시절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북한군이 암호명 ‘폭풍224’라는 치밀한 사전 계획에 따라 선전포고 없는 기습 남침으로 3일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그날 새벽 2시30분을 기해 우리 국군이 한강대교를 폭파하면서 시민들은 피난길이 막혀버렸고 정부가 부산으로 옮겨지면서 카인과 아벨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UN군의 지원을 받게되고 중국 인민군 참전으로 국제전으로 격화 되었다. 3년 1개월간의 교전 끝에 1953년 7월 27일을 기해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렇듯 70년이란 긴 세월을 분단이란 아픔을 겪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극동 아시아의 미소 냉전에서 승기를 잡으려는 의도로 스탈린과 김일성의 획책에 희생된 전쟁이었다. 오늘날까지 굳어져버린 각각의 체제로 통일에 실패한 채 대립을 고수하고 있다.
6.25 전란으로 우리 국군 62만, 유엔군 16만, 민간인 250만이 사망했고, 무려 천만 명이 가족과 생이별하면서 70년 동안 이산가족들의 아픔과 회한은 한숨과 눈물로 이어지고있다. 만남을 기대하시다가 세상을 떠난 분들의 허탈과 한탄은 해답 없는 메아리로 허공을 맴돌고 있다. 휴전 협정을 통해 한반도에서 총성은 멈추었지만 국제법상으로는 여전히 전쟁 상태를 유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협상을 통해 전투를 잠시 멈춘 상태를 일컫는 상태지만 교전 당사국들이 정치적 합의를 이룰 수 없는 상황이라 다만 전투 행위만 정지된 것일 뿐, 끝나지 않은 6.25로 존재하고 있다. 한반도 현실은 언제든지 군사적 도발로 전쟁 상태로 돌입할 수 있음을 잠시라도 잊어서는 안되는 대치 상태로 재해석된다. 해서 6.25는 끝나지 않았다.
지구상 몇 안 되는 분단국가로 군사적 위협이 항시 존재한다. 북한은 끊임없는 핵 도발로 호시탐탐 세계를 불안으로 몰아넣고 있는 만행이 자행되고 있는 곳이 한반도의 현주소다. 그토록 치열했던 전쟁은 전 국토를 초토화시켰지만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은 휴전 상태로 200만명의 남북한 정규군이 초현대식 무기로 무장하고 대치하고 있다. 세계 전쟁 사상 유례없이 처참했던 3년 1개월 전쟁 참상을 기억해서라도 전쟁 없는 국토 한반도로 만들어가야 할 터인데 북한은 온통 핵과 미사일에만 관심 쏟기에 혈안이 되어있다.
6.25는 한국인의 살아있는 역사로 나의 이야기이자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우리집 할배는황해도 서흥군 목감면 장양리 347번지가 고향이다. 고향에서 태어나 6.25를 만나서 함경남도 흥남을 향해 피난길을 선택하신 부모님을 따라 12살 나이에 두 살 된 여동생을 업고 부모님과 4남매가 엄동설한 추위 속에서 길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눈길을 헤치며 피난 길에 올랐다고 한다. 몇 날 며칠인지 모를 긴 여정 끝에 흥남에 도착했지만 모든 피난 도주로는 막혀버리고 미군들을 철수시키는 화물선 한 척 만이 유일한 탈출구로 남게 된 정황이었다. 당시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되면서 전세가 불리해지자 동부전선의 미10군단, 국군 1군단이 1950년 12월 15일부터 23일까지 흥남 항구를 통해 해상 철수작전이 시작되면서 흥남부두에 모여든 피난민을 구출시킬 목적으로 대규모 철수작전이 시작된 현장을 만난 것이다.
당시 군함에 타고있던 ‘현봉학’ 씨는 피난민들을 태워달라고 애원했고 더는 피할 길이 없는 난민을 보고있던 선장 ‘에드워드’ 장군은 무기를 버리고 난민을 태우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배는 오직 한 대 뿐으로 난민 숫자는 거의 10만명 정도였다. 배에 제대로 승선하지 못한 사람들은 밧줄에 매달려서 배에 오르기 시작했고 우리집 할배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로지 밧줄 하나에 생사를 맡기고 영화 ‘국제시장’ 덕수처럼 여동생을 업고 아득한 군함 상단을 향해 사력을 다해 손에 피가 나도록 기어 올라 겨우 배에 올랐다 한다. 셀 수 없는 사람들이 바다로 떨어지는 아수라장을 목격하면서 기어코 배에 오를 수 있었고, 우여곡절로 배 안에서 가족 상봉을 하게 되고 무사히 거제도에 도착했다고 한다.
푸른 숲의 나무들, 향긋한 풀 내음에 취할 수 있는, 잦았던 비가 개이면 하늘 깊은 푸른 빛이 반가운 6월이다. 6월이 가기 전에 어찌 이런 비극적 역사를 만들어야 했는지 무엇 때문에 격렬한 전투에 임해야 했는지, 수 많은 희생의 죗값은 누가 짊어져야 하는지를 밝혀내고 휴전을 종전으로 종지부를 찍고 싶은데, 동족상잔 비극을 저질러 놓은 자들은 잘못을 뭉개버리고 핵무기라는 공포를 전세계로 확산시켜가고 있다. 무력으로 정권이 우상화 된 정치 세력은 지구상 어디에도 용납될 수 없고 존재해서도 아니될 망령이기에 자유 민주주의의 선한 가치와 희망을 양보해서는 안될 것이다.
끝나지 않은 6.25를 영원한 종전으로 끝맺음을 이루어낸 6.25로 기억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한민족 역사 위에 남겨진 6.25를 상기해 본다. 한국인은 어느 민족에게도 발견할 수 없는 정을 품고 있을 뿐 아니라 은혜를 망각하지 않으며 민주주의를 주창하며 지켜왔다. 은혜를 아는, 사랑 보답을 실천할 줄 아는 민족임을 자부할 수 있는 민족혼을 잃지 않으며 대대손손 실천해 가야 할 것이다. 끝나지 않은 6.25를 끝 맺음 하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