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나(메릴랜드)
마음이 허해서인지 요즘 법륜스님의 말씀을 필두로 마음에 관한 이야기들을 섭렵하는 중이다. 그 말씀 중에 내 마음에 딱 고정되어 생각에 꼬리를 물고 다니는 화두 하나가 남겨졌다.
중년의 나이가 되면서 관계에 대한 정의가 흔들리더니 팬데믹이라는 어마어마한 파도가 전 세계를 강타하면서 인간관계의 정립에 새로운 정의가 생기기 시작했다. 가까운 가족은 물론이고 믿었던 친구며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 금이 갔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각자의 가치관이 함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되고 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는 동안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사고로 살아가야 하는지 모른 채 오로지 아이와 남편 그리고 가까운 주변 사람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완전히 나를 잃어버리고 불행했냐 하면 그건 아니다. 결혼하면서 인생의 동반자를 만나 아이를 세 명씩이나 낳아 열심히 건강하게 키웠고 지금까지 나름 행복이라는 기준에 부합된 삶을 살았다
다만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뒤로 미룬 채 하나의 목표만을 가지고 뒤도 옆도 보지 않고 앞만 보며 살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의 목표가 있었기에 홀로서는 방법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고 어찌 보면 그때의 그 바쁨과 그때의 열정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랬기에 많은 사람이 그러하듯 나를 잊은 채 지나간 시간에 대한 회한과 미련이 남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떠한가? 아이를 키운다는 목적이 점차 희미해지고 빈 둥지를 지키는 어미 새가 되어가고 있는 요즘, 이제는 혼자 사는 삶의 목적과 방향이 정해졌는가? 아니다. 목적이나 방향은커녕 알면 알수록 어려운 게 사람 속이듯 삶의 의미조차 알지 못해 오히려 삶을 가벼이 여기고 즐겁게 하루하루를 사는 것도 버겁다.
그러다 중년이나 노년의 외로움에 관한 즉문즉답에서 법륜스님의 ‘나 자신과 친구로 살아라‘는 말씀이 내 머리를 내리쳤다. 말로는 항상 깨어있어 나를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한다고, 이 순간의 행복을 실천하라는 말을 수없이 들으며 실천하고 있다고 자부했건만 이 모든 것은 나를 내가 바라보고 있어야만 성립된다는 말이었다는 걸 왜 이제야 깨닫는 것인지 참으로 어리석다.
하지만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와, 나를 바라보는 객관적인 내가 있다는 생각과 그 밑바탕에는 자신을 사랑하는 믿음이 있어야 가능하다. 즉, 나 자신이 나를 바라보는 내가 있다는 걸 확신해야만 나 자신과 친구로 삼을 수 있다. 사람은 늘 생각한다. 그 생각하는 자가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자가 자기 자신이라고 말한다.
누구는 그런다. 나 자신을 알아가는 여정이 바로 인생이고 남에게 보여주는 삶을 살지 말고 나다운 삶을 살라고 말한다. 해가 나오면 밝아서 좋고 비가 오면 빗소리가 좋아서 좋고 추우면 차가워서 좋고 더우면 땀이 나서 좋은 그런 나와, 그런 나를 조용히 지켜보며 바라봐주는 내가 있다면 이 세상 살아가는 힘이 절로 생기지 않을까? 나 자신을 친구로만 삼을 수 있다면 혼자서도 외롭지 않게 산다는 것이 가능할 것이고 더 나아가 나를 지지해주는 든든한 절대적 지지자가 생기는 일이다.
하지만 이는 말처럼 간단하거나 단순한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화가 나는 나를 보며 자제해야 한다는 친구의 알아차림에 귀 기울어야 하고, 외로움에 발버둥 칠 때 홀로 있지 않고 친구와 함께한다는 알아차림에 슬퍼하지 않아야 하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친구가 전하는 희망적인 마음으로 알아차려야 한다. 결국엔 혼자인 나의 외로움을 내가 친구가 되어 이겨낼 수 있다는 말에 희망을 걸어본다. 단, 나 자신에게 말한다며 중얼병에 걸리지는 말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