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희 목사
구약성경의 창세기를 보면 창조주께서 모든 만물을 만드실 때 한 가지 창조가 끝나면 언제나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했으나 인간 즉 아담을 만들고나신 후에는 처음으로 “좋지않다”라고 말씀하신 사실을 기억하십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을 만든 후에 “사람의 독처하신 것이 좋지 못하니”하시고 하와를 만들어 세운 후에야 비로소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우리는 우주 창조의 새 아침에 에덴의 동산에서 사랑을 조형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손길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범죄 이전의 아담과 하와의 사랑이 에덴의 아침 동산에서 이루어지는 황홀 속에서 우리들의 사랑의 근원적인 모습을 찾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보다 더 진하고 리얼한 원색적 인간의 사랑의 얘기는 아침이 아닌 저녁 노을이 질 때 시작된 사연이었습니다. 황량하고 허무한 고독이 가슴을 때리는 노을진 어스름한 원시림의 저녁 에덴의 동쪽으로 범죄한 인간 아담과 하와가 가시밭길을 헤치며 서로를 붙들고 서로를 포옹하고 흐느끼면서 위로하며 가는 처절하고도 눈물겨운 행진 바로 거기에서부터 타락한 인간의 사랑이 출발할 수 있는 최초의 상황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이란 단어의 의미부터 올바르게 정의하고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헬라원어 사랑의 언어는 크게 나누어 아가페와 에로스 그리고 필리아의 세 가지 영역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가페는 흔히 알려진 대로 “이타적인 자기 부여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하나님이 범죄한 인간을 위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희생적 성애를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내신 희생적 성애를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로스는 “사랑스러운 자. 무슨 이유에서든 간에 사랑하고 싶어지는 자”를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현저한 특징은 당신을 나의 것으로 소유하려는 성애 속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필리아는 쌍방에 함께 적합한 흥미와 유익을 근거로 해서 비롯되는 소위 우정이나 인정의 차원에서 이해 되어져야 하는 보편적 사랑입니다. 나의 이브/ 우리들의 사랑은 이 세가지 영역 가운데 어디에서나 이루어져야만 하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이 사랑은 아가페적인 것이어야 하겠으나 홀로 아가페적인 것이 성경적인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위에 말한 세 가지 영역을 함께 공유하고 연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사랑이 형성되는 그 지배적인 갈망의 핵심은 아가페적인 것이어야 하겠다는 데에는 이의 없습니다. 우리는 함께 우리들의 사랑이 당신을 나의 편리와 나의 요구를 위해서 이용하고 그것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잘못된 프라그마틱(실용주의)적인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해야만 하겠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사람들의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는 말은 결국은 ‘나는 나를 사랑하는 의미에서 당신을 원합니다’는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람세이(P. Ramsey)의 사랑의 오류에 대한 고발을 피할 수 없이 되고 말 것입니다.
나는 최근에 친구들의 결혼식에 참석해서 주례하는 목사님이 낭독하시는 혼인 서약문의 일절을 들을 때마다 심각해지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더 잘 되거나 더 못되거나 부요하거나 가난하거나 병들거나 건강하게 되는 어떤 경우에서든지 그대 옆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기로 서약하느뇨”
그렇습니다. 이 이색적인 자기 증여적인 그리고 비요구적인 사랑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사랑에 있어야 할 가장 본질적인 윤리라는 사실을 나는 백퍼센트 수정없이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시대와 함께 변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함께 이 사랑을 하나님께로부터 배웠던 것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은 어제와 오늘이 날마다 달라지는 급변하는 이 시대적 정황 속에서 어제는 미워하고 오늘은 살인하는 그런 범죄하는 우리 인간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불변하는 사랑으로 계속해서 인간을 부르시고 찾아 만나 조건없이 영원히 사랑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