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유창 목사(몽고메리 사랑 한인교회)
“죽음”과 “영광”은 다른 이름이면서 동등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인생의 실존입니다. 이 가치를 깨우쳐 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히브리어로 사람의 목숨을 “네페쉬(Nefesh)”라 부릅니다. 문자적 의미는 “호흡”, “생명”, “영혼”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을 인간의 생명에 비유하신 유일한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 16:26) 부(富)와 명예(名譽)는 재기할 수 있습니다.
한 번 잃어버려도 또 다시 재도전하여 회복할 수 있는 것이 “부(Wealth)”와 “명예(Honor)”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영혼이 담겨있는 생명은 한 번 잃어버리면 “또 다시”라는 것이 없습니다. 사람의 시각으로 바라본 십자가와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본 십자가는 <하늘과 땅 차이>임을 깨우쳐 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 16:23)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예고하였을 때 베드로는 항변하면서 외친 말이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2) <베드로의 하이라이트>는 그의 <신앙고백>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이것은 “영광”에 해당되는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의 실존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한 몸에 담고 있는 분.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영역을 망라하여 아우를 수 있는 분이라는 시각에서 접근한 자가 바로 베드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초점을 자신에게 두지 않으시고 오히려 <온 세상>에 초점을 두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Cross)>는 <온 세상은 예수님의 목숨과 바꿀 수 있는 존귀함의 가치를 담고 있는 존재>임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셨듯이 십자가는 죽음 자체가 전부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존귀한 가치는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죽음”과 “영광”의 동등한 가치를 부여하신 분이 예수님이시기에 오늘을 살아가는 인생들은 자신의 가치를 <일회적인 존재, 하루살이>와 결코 비교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인생>을 <온 천하보다 귀한 존재>임을 밝히셨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한낱 컴퓨터 게임의 실험대상으로 가볍게 여김으로써 살인도 서슴지 않고, 또한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것에 대해서조차 숙고(熟考)하지 않는 것이 <오늘날의 자화상>입니다. 온 천하를 다 얻는다 해도 그것과도 바꿀 수 없는 <존귀한 존재>가 인생입니다. 이천 년 전에 시대를 앞질러서 밝히신 <예수님의 생명 선언문>이 마태복음 16장 26절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영광”을 다 바쳐서 피 흘려 죽으신 십자가. 오늘 이 세대는 주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베드로의 시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으로 시선의 변화를 일으켜 <인생의 가치 혁신>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