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유창 목사(몽고메리 사랑 한인교회)
시인, 칼 부세(Karl Busse)는 “저 산 너머(Over The Mountains)”란 시에서, “산 너머 저쪽 하늘 멀리/행복이 있다고/사람들이 말하기에/아, 남들과 어울려/행복을 찾아갔다가/눈물만 머금고/되돌아왔네/산 너머 저쪽 하늘 저 멀리/행복이 있다고 말들 하건만.”
시인이 노래한 <행복의 파랑새>는 산 너머 저 멀리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집 창가>에 앉아있음을 발견하고, <행복의 파랑새>를 아득한 내일에 가서 찾지 말고, 바로 주어진 오늘에서 찾으라는 현명한 지혜의 잠언입니다. 성경 가운데 한 곳에서 집중적으로 <행복>을 말씀하고 있는 예수님의 산상수훈 대서론(마 5:1~12)을 <팔복(The Beatitudes)>이라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첫 발을 내딛으실 때, <행복한 가정(Home Sweet Home)>을 찾아오셨습니다. 아버지 요셉, 어머니 마리아가 이제 막 신혼의 단 꿈을 펼치려 할 행복의 절정기에 가정에 <지상의 첫 발>을 내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정과 행복>은 <지상천국의 완벽한 모델>임을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그 예수님이 <산 위로 올라가 앉으셔서 예수님의 제자들> 앞에서 <천국의 행복>을 여덟 가지 버전으로 전하신 중요한 천국 메시지가 <마태복음 5장 1절~12절의 말씀>입니다. “복이 있나니”(마 5:3~11)는 핵심 메시지 중의 핵심 메시지의 <골자어(骨子語, Key Word)>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성경 기록어인 헬라어 원문성경에서는 “복이 있나니”가 더욱 구체화되어 “복이 있는 사람들”의 복수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가정이라는 <복수, 가정 공동체의 행복>을 말씀하시고, 더 나아가서 <복수, 천국 공동체의 행복>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할지어다!”보다 더 강력한 행복의 메시지는 <축하하노라!> <기뻐할지어다!>라고 하는 <축하 메시지(Congratulation)요 격려 메시지>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일 먼 훗날의 행복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오늘, “축하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오늘, “격려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이 그만큼 중요한 <행복 공동체>이기에 팔복의 서론과 결론에서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일관성 있는 <천국 행복 공동체>임을 피력하신 것입니다.
행복은 어떤 특정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란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 이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 <지구촌 전체의 것>이란 말씀입니다. 바로 그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입니다. 이것은 결코 <미래형>이 아니라, <현재형>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 애통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긍휼히 여기는 사람들,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 화평하게 하는 사람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되라!>는 천국시민, 예수님의 참 제자의 디렉션입니다. “오늘, 나는 심령이 가난한가? …오늘, 나는 의를 위해 박해를 받고 있는가?” 이 <의사 의문문(Tag Question)의 예리한 가르침>이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골자입니다. 아울러, <행복의 파랑새>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는가?’라는 이 질문에 긍정적인 답 <예(Yes)>이면, 나는 <축하받기 위해 태어난 행복자>입니다. <기쁨의 격려받기 위해 태어난 행복자>입니다.
멀리 가서, 먼 훗날에, 저 산너머에 <행복의 파랑새>는 없어서 “눈물만 머금고 되돌아왔네”라는 후회하는 인생이 되지 않으려면 예수님의 <팔복 메시지>를 깊이 깊이 영혼에 아로새기고, “축하하노라! 내 인생아!”를 외치며 <행복의 파랑새>를 <내 집 창가>에서 발견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