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희 목사
시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시간이란 하나님께서 내가 마땅히 해야 할 과제를 성취하기 위하여 맡겨주신 삶의 길이를 의미한다”고 믿는다. 잘 사용하기만 하면 무한한 가능성을 현실로 소유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시간이라고 생각할 때 시간은 분명 위대한 기본이다. 그러기에 어떻게 시간을 사용하느냐 하는 것은 단순한 물음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간은 하나의 시험이다. 모든 사람들이 다같이 24시간이라는 같은 분량의 시간을 소유한다. 시간은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대우를 베푼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동등하게 시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시간에 대한 이해 태도에 따라 삶을 대하는 자세도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시간을 하나의 둥근 원으로 생각하는 철학적 입장이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시간은 돌고 도는 것이다. 어제는 오늘로 이어지고 오늘은 다시 어제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순환론적 시간 관은 시간에 대한 긴장을 제공하지 않는다. 시간은 언제나 있는 것이며 오늘 못한 것은 내일 다시 시도할 수 있다. 이렇게 시간을 이해한 사람들에게서 문화나 역사의 바람직한 발전을 기대할 수는 없다.
둥근 원의 상징처럼 결국 모든 것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 오는 허무가 순환론적 생의 이미지를 형성할 따름이다. 회교나 불교의 윤회 철학은 이런 시간관에 뿌리박고 있다. 중산주의의 시간 관은 변증법적인 것이다. 그들에게서 역사의 변증법적인 발전은 바로 역사의 필연이다. 이런 시간관을 우리는 하나의 삼각형으로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간관은 순환론적인 것에 비교한다면 확실히 발전적이다. 그러나 삼각형이 끝나는 곳에 역사는 다시 정과 반의 운동을 통하여 새로운 합을 지향하면서 또 하나의 삼각형을 그린다. 어느 문화 철학자의 비판처럼 이것은 결국 형태를 바꾼 어제의 반복일 뿐이지 전혀 발전이 아니다.
오늘의 공산주의 사회의 구조적 모순은 그들의 이데올로기가 심은 열매를 거두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면 성서를 믿는 그리스도인은 시간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성서의 시간은 분명한 시작에서 분명한 종말을 지향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시간의 알파이시며 오메가이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서에 나타난 시간은 단순한 흐름이 아닌 목적 지향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시간은 허무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설정된 무대 위에서 놀라운 기대와 의미를 갖고 좌절이 없는 드라마를 연출한다. 역사란 결국 “그 분의 이야기 인 것이다.” 인간의 역사가 그 분의 뜻을 떠날 때 그 분은 역사를 방관하지 않고 역사 속에 뛰어 드시고 역사를 간섭하신다. 인간은 그 때마다 소위 역사의 위기를 경험한다. 그러나 이 위기는 역사를 하나님의 목표에 적중시키려는 하나님의 섭리 곧, 섭리의 시작이다.
때가 찰 때마다 하나님께서 임하신다. 그래서 역사는 비로소 우리는 생의 참된 목적을 인식할 수 있다. 지나간 시간은 다시 반복될 수 없는 시간이다. 오늘은 다시 올 수 없는 오직 한 번만 존재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삶은 엄숙한 것이며 진지한 것이다.
시편 기자는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편90편12절), 그리고 시편 90편10절에서는 “우리의 년 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고 했는데 현재 나의 나이를 칠십에서 빼면 나는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인생을 시편 기자의 말처럼 칠십이라면 나는 몇 퍼센트를 살았는가? 계산해보자. 이 같은 물음이 앞으로 남은 나의 삶을 어떻게 창조적으로 계획하며 나갈 수 있느냐에 대한 도전적 사고를 형성함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