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희 목사
성 혁명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교회의 강단에서만은 아직도 성은 타부시(taboo)되고 있다. 그래서 교회에서의 기독교적 혹은 성서적 관점에서 성을 배우지 못한 오늘의 그리스도인 젊은이들은 별 수 없이 성을 상품으로 파는 플레이보이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거나 주간 잡지의 외설에 눈을 팔고 있다. 결과적으로 오늘의 교회는 젊은 이들에게 성에 대한 이중표준을 허용하고 있다. 언제나 우리 한국 교회에서 성의 신학이 정립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접근은 얼마나 대담한가?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성의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찌라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서로 분방하지 말라.”(고전7:3-5)
이보다 더 솔직할 수 있는 발언을 어디에서 찾겠는가? 성경의 성에 대한 접근은 결코 우회적이 아니다. 직접적으로 원리와 태도를 선언한다. 그런 의미에서 성을 가르치는 일에 있어 성서는 탈월한 성서의 기능도 배제하지 않는다. 일찍이 성 어거스틴은 “모든 성적 충동은 악한 것이라”고 단정하였다. 성에 대한 남용의 경험이 가져온 죄책과 어두운 방황 때문에 그는 자녀번식 이외의 모든 성교는 악한 것으로 단정하였고 독신생활만을 가장 경건한 삶의 형태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어거스틴의 성 윤리는 빅토리안 성 윤리와도 통하는 것이었다. “성은 곧 사탄이 창조한 것이다.”는 선언에 이르러 성에 대한 반론은 절정에 달한다. 그래서 빅토리안의 후예들인 오늘의 경건주의자들은 성은 결혼을 위해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즐겨서는 안될 것이라고 소리를 높인다. 곧 성의 특권을 부인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성에 대한 금기의 신학이 형성된 배경을 알만하다. 그러나 창조의 기사에서 성은 얼마나 적극적으로 옹호되고 있는가? 그러나 창조의 기사에서 성은 얼마나 적극적으로 옹호되고 있는가?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7)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31)고 하시지 않았는가.
인간 타락의 분명한 현실과 그 전적인 부패의 징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성은 아름다운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에게 성을 주셨기 때문이다. 성은 하나님의 최초의 선물이었다. 한 남성과 한 여성이 형성하는 부부 관계의 신비는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가 지니는 그 심오한 미스터리 만큼이나 신기하고 영광스러운 경이에 속한다. 따라서 성서 신학의 균형을 이해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바울과 함께 소리를 높일 수 잇다.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찌니 이 비밀이 크도다”(엡5:31-32)
나는 강단 앞에서 한 치의 의의 없이 성의 남용과 오용을 경계하는 오늘의 청교도 설교자들의 “아멘”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성의 적극적인 선용이 강조되지 않는 현실 앞에서는 말할 수 없는 공허를 느낀다. 나는 가끔 “그리스도인의 침실은 어디까지 자유가 허락되어야 하느냐”는 솔직한 질문을 젊은이들에게 받는다. 이 글은 원칙적으로 그런 질문에 대한 실제적인 대답의 한 표현으로 씌여진 것이다. 그러나 성을 말하려면 먼저 우리는 인간 관계라는 선협 적인 전제를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누군가가 말한 “성교란 인간의 전인적 케뮤니케이션의 상징적 행동”이란 말을 나는 동의한다. 성행위는 결국 인격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만약 성에서 인격을 분리시킬 때 그때부터 성은 상품으로 전략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드볼(Duvall)이란 사람은 인간의 성 경험을 네 단계로 나누었다. 이 네 단계는 다음호에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