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희 목사
시어머니와 며느리 이 두 개의 낱말은 언제나 긴장과 갈등의 명사들로 사용되어 온 역사적 언어들이다. 한 집에 두 개의 머리가 있을 수 없다는 사고 때문에 아예 분가를 통해서 독립적인 왕국을 형성해 온 서양의 문화 속에는 그래도 나름 대로의 자유를 지키고 누리면서 덜 긴장해 왔고 덜 갈등을 겪어 온 듯 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한 집에서 여인의 왕좌를 둘러싼 그 길고 긴 내력과 고민은 차라리 비극적이었다. 아들이 내 품에서 자라던 그 향수를 떨쳐 버리지 못한 과거 속의 시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돌아가셔야 내가 이 집의 실권자가 된다는 미래 속의 며느리는 만날 수 없는 두 개의 선을 달리는 평행선처럼 맞서 왔다.
그리스도인도 별 수 없다는 것이 정직한 고백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 정말 새로운 진실이라면 새로운 질서속의 고부관계는 어떤 철학에 의해 어떤 태도로 맺어져야 하는 것일까?
먼저 시부모에게 할 말이 있다. 결혼이란.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는 것” 이라면 왜 아들이 내 품에서 떠났다는 성서적 사실을 수용하지 못하는 것일까? “떠나 보내달라”는 며느리의 간원과” 떠나보낼 수 없다”는 시부모. 특히 시어머니의 고집 사이에서 그 한국적 너무나 한국적인 한의 줄다리기는 시작되는 것이다. 따라서 정서적 시부모가 되기를 원하는 이마다 부부 관계의 우선권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며느리는 결코 사랑의 경쟁 상대가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아들이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사랑의 차원과 자기 부모를 사랑하는 사랑의 차원은 대립적인 두 개의 영역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에 속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겠다. 무엇보다 자녀의 행복이 부모 자신의 행복임을 아는 지혜가 있다면 시부모들은 자식을 축복하며 떠나 보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지나친 도움도 간섭도 않는 것이 자식들의 정신적인 건강을 위해 유익한 일이다. 함께 공존하며 독립과 사랑의 균형을 나누기 어렵다면 차라리 분가시킨 다음 서로 돕는 편을 선택하는 것이 더 현명한 결단일 수 있다. 함께 살게 되는 경우 시어머니는 되도록 주인의식을 삼가 하고 며느리에게 명령보다는 제안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더 지혜로운 의사소통의 비결이다.
왜 며느리는 며느리라는 고정 관념으로 꼭 취급 되어야 하는 것일까? 아들이 내 아들이듯 며느리는 내 딸일 수 없는가? 며느리가 빨리 내게 호흡을 맞출 수 없다고 푸념하는 시부모님이 게시다면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다.”는 말씀을 상기하라고 권하고 싶다. 나는 얼마나 오래 내 아들에게 참아가며 적응해 가며 그를 길러 왔는가? 그런데 우리 집에 들어온 내 며느리가 나와 하루 아침에 장단이 맞추어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얼마나 성급하고 독단적인 소원인가. 무엇보다 시부모는 이제 아들보다도 며느리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해의 창을 열어야 한다. 이 창이 열릴 때 사랑의 대화는 움트기 시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