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자(시인·수필가)
볕살이 따가운 봄 날, 우리집 할배랑 마트에 들리게 되었다. 식료품 파트에서 카트를 워커삼아 밀고 가다가 진열된 상품 구색을 구경하느라 카트에 몸을 맡기고 한참 동안을 놀이에 집중한 아이처럼 무아지경에 잠겼을 무렵 “어딜 갔었어, 한참 찾았잖아.” 우리집 할배 소리에 정신이 번뜩 든다. 언제쯤이면 이런 나로 부터 안도할 수 있을까. 어디 쯤에 데려다 놓아야 삶의 민낯을 제대로 간수할 수 있을까. 우리집 할배 옆에 길 동무라는 깃발을 나란히 세워두고 싶은데. 융통성 없이 지나치게 자신에게 정직해서 얄밉다. 대체로 엇박자 게임에 어울리는 확률이 높은 편이다. 우연같은 필연의 반복이 감지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내가 다 이해되는 것은 더욱 아니다. 뇌 기억 저장 회로가 선택적 기억을 위주로 뇌 기능 담당 계열을 장악해버린 현상은 아닐까. 한번 집중하면 주변을 의식하지 못하는 습벽에서 벗어나 고르게 기억을 붙들고 일상을 이어갈 수 있기를 소원해보지만 깜빡이는 뇌 신호등은 용량 초과인가 보다.
소풍이나 운동회 땐 소나기가 어김없이 방문해 주었던 일이며 맛있게 자고 있는데 걸려오는 전화는 대부분 잘 못 걸려온 전화요, 준비성을 믿고 우산을 들고 나가면 일기예보도 무색하게 흐리던 날도 보란듯 개인다. 서둘러야 할 일이 생겼는데 바로 내 앞에서 신호 등이 얄미울 만치 빨간 불로 바뀐다. 매일 다녔던 길이었는데 오늘따라 공사 중 서행으로 빠져나가기가 한참이다. 실로 오랜만에 휴양지를 찾기로 했는데 때 맞추어 태풍이 찾아 들어 취소의 고배를 마신 경우 등이다. 머피 법칙은 세상을 비관적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한편으론 법칙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에게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보편적 현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다소의 위안을 얻게도 된다. 나쁜 일만 일어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일어나는 일은 어쨌든 일어나게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정도라는 곁길을 열어주고 있다.
‘어차피’‘하필이면’‘왜 나만’이란 의문이 전제되는 일들이 세상에 날리고 날려 있다. 하루 일상을 보내는데도 문득 문득 스쳐가는 일들이 줄을 설 때면 남의 인생은 별로 큰 노력 없이도 일들이 잘 풀려가고 호박이 넝쿨째 굴러온 인생을 살아가는데 왜 하필이면 이 인생은 안간힘을 써도 깜깜 절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급하게 화장실을 찾았을 때 휴지가 없던 일을 겪은 후 휴지를 준비하고 다니면 화장실 찾기가 오리무중이었던 한국 방문 시의 머피 법칙이 떠오른다.
이 뿐 아니다. 맘 먹고 세차 해놓은 차에 새똥이 앞 유리창을 장식하고 있던 일, 50% 세일 광고를 믿고 모처럼 옷매장을 찾았는데 구입할만한 옷은 정가판매였고 때를 넘긴 옷들만 세일 표시가 버티고 섰던 일. ‘하필이면’ ‘왜 나만’ 이 빠질 수 없다며 끼어든다. 남들은 편안하게 잘들 걸어 다니는데 왜 나만 하필이면 walker 없이 편안하게 걷지 못하는가. 어떤 이들은 펜만 잡으면 깊고 멋들어진 글이 풀려나오는데 왜 나만 하필이면 매끄럽지 못한 궁색하고 구차한 글로 간주되는 글들이 쓰여질까. 운명적 불공평으로 하루를 살아가면서도 ‘머피 법칙’을 생각할 수 밖에 없음이 혼란스럽다.
물 좋고 정자 좋은 곳이 없다 했다. 고통이 행운의 씨앗을 잉태하듯 부정적인 머피 법칙이 있는가 하면 긍정적인 샐리 법칙도 있다. 실수 투성이 주제에 생의 짐이 무겁다고 징징거리는 소견이 부끄럽다. 봄이라는 이토록 선한 계절에 머피 법칙을 외면할 수도 없고 피해가고 싶을수록 번번히 적용되는 머피의 의미를 되짚어 보게 된다. 어떤 법칙이든 일상 곁을 떠나지 않는 기이한 현상들을 음악 장르와 비교해 보았다. 발라드에 마음이 끌리는데 로큰롤이 흥겹게 다가오기도 하고 모짜르트 피아노 협주곡 6번이나 12번에 젖어있고 싶은데 갑자기 트롯이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지경이라고 설명해야 할까. 계절에 맞는 선택적 장르로 분위기를 만들고 싶은데 웬 오지랖인지 뜬금 없는 멜로디에 몸을 싣게 되곤 한다.
매끈하고 범상한 일상에 실려가지 못하는 불안이 야기될 때마다 왜소해지는 나를 보게 된다. 머피 법칙의 어줍은 본보기로 남고 싶진 않은데 세월따라 익혀낸 줄 믿어왔었는데 새삼 서툴고 어설프고 매사에 익숙지 않은 내 모습을 보고서야 비로소 한계를 보게 되는게 면구하다. 왜일까. 질문은 질문을 끌어 모으고 질문들은 봄날의 현란한 색상 하모니 앞에 머쓱한 시선으로 두리번거림을 보게 되면서 그래도 남은 날들은 꽤나 멋지고 근사할 것이라 우격다짐 예측해 보고 싶어진다. 송고해야 할 수필 퇴고를 끝내고 창문을 열어 본다. ‘하필이면’ 봄날 밤 풍경이 유난히 맑고 쾌청하다. 청명한 하늘을 거니는 구름이 ‘어차피’ 하늘을 거니는 것이 아니라 한다. ‘왜 나만’ 구름이 되었을까를 생각치도 않는다 한다. 해서 머피 법칙을 피하지 못 할 바엔 즐겨보자는 다짐지기를 해보면 어떨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