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희 목사
내가 만약 행복한 새집을 설계한다면 어떻게 할까? 좋은 터를 닦고 튼튼한 기둥을 세우고 예쁜 창문을 내고 낭만이 있는 대문을 만들고 견고한 지붕을 덮고 그 지붕 위에 나와 내 사랑하는 이를 닮은 한 쌍의 비둘기가 찾아와 앉는 집을 짓고 싶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좋은 터가 어디있을까?
예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집을 짓는 두 사람의 얘기를 하셨다. 한 사람은 모래 위에. 또 한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었다.
두 개의 집이 다 지어진 다음에 다른 이들은 아무도 이 둘의 차이를 알 수 없는 만큼 두 집은 유사하였을 것이다. 집의 구조가, 집집의 색깔이, 그리고 외관상의 형태도 아마 그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폭풍우와 비바람이 불기 시작했을 때. 그 차이는 쉽게 드러났다. 모래 위에 세워진 집이 힘없이 무너짐에 반하여 반석 위에 세워진 집은 끄덕없이 버티고 서 있었다. 무슨 차이일까? 물론 기초의 차이 때문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다”고 하셨다(마7:24-27). 결혼을 설계하는 모든 젊은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으로 스위트의 터를 닦으라고 부탁하고 싶다.
옛날 하나님의 집 솔로몬의 성전에는 야긴과 보아스라는 견고한 커다란 두 개의 기둥이 이 집을 세워 주고 있었다. 우리 집에는 무슨 기둥을 세울까? 사랑과 순종의 두 기둥을 세워야만 하겠다.
성서는 가정의 모든 구성원의 절실한 인간관계에서 다른 어떤 교훈보다 사랑의 윤리와 순종의 윤리를 강조하고 있다. “남편이여 아내를 사랑하라” 아내에게는 “남편에게 순복 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하신다. 부모에게는 “자녀를 사랑하고 하신다” 자녀에게는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고 하신다. 사랑과 순종의 교훈을 배우지 못한 부부는 결코 행복이라는 하늘을 날을 수 없다.
창문이 없는 집은 얼마나 답답한가. 그것은 차라리 감옥이다. 하늘의 빛을 유도하는 창의 반짝임 속에서 우리는 희망과 창조의 숨결을 모은다. 창이 있어서 비로소 우리들의 집에는 은혜의 빛이 머문다. 우리가 설계하는 집에 꼭 있어야만 할 두 개의 창을 이해와 용서의 창이라고 부르고 싶다.
부부관계는 어떤 유형의 인간관계보다 가까운 것이다.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내 약점, 내 허물을 가장 잘 아는 당신에게 나를 노출하고 살아야 하는 인간관계가 곧 부부관계가 아니겠는가? 주께서 나를 용서하신 것처럼 나도 당신을 용서하면서 당신께로 나아가는 이 창이 없이는 우리의 집은 한 순간에 흑암의 스올로 변신한다.
그런데 이 용서의 명제는 실로 이해를 견제하지 않고는 설명될 수 없는 언어이다. 이해는 문자 그대로 “아래, 서는 것(Under Standing)”이다. 겸허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립보서2: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서로 받음으로”(로마서15:7) 용납하는 이들의 집에 축복의 빛은 쏟아져 들어올 것이다.
또한 낭만이 있는 대문을 만드는 것을 잊지 말자. 이웃이 쉽게 노크할 수 있는 문턱이 높지 않은 대문을. 남편이 퇴근길에 그 걸음을 재촉하여 빨려 들어오는 마력이 있는 대문을. 그래서 이 문으로 인하여 사랑의 커뮤니케이션이 성숙하고 증거의 열매가 맺히는 향기있고 격조높은 고티나는 대문을 한번 만들어보자.
그 다음에 지붕을 덮어라. 지붕이 없는 집을 연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이 지붕을 우리의 영적 생활에 비교하고 싶다. 영적 삶이 없는 가정은 곧 지붕이 없는 집의 꼴이다.
문제 앞에 부딪힐 때마다 시시 대대로 필요한 지헤를 얻기 위해 성서를 읽는 가정, 찬양과 증거의 리듬이 살아있고 성령의 충만함이 현저한 규칙적 가정제단이 있는 가정에서 우리는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이 삶을 꿈꾸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