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운 (LA미주본사 경제부 기자)
금융기관 파산과 관련해 우스갯소리처럼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폭우가 닥친 어느 날 은행 앞에 비를 피하려는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이 광경을 본 택시 운전사가 “저 은행이 망할 것 같아 고객들이 줄을 서서 돈을 찾는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 이후 사람들은 정말 예금을 회수하기 시작했고 은행은 뱅크런 위기에 빠진다. 그러다가 택시 운전사의 말처럼 정말 망하게 되버린다는 것이다.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사태와 이 이야기를 겹쳐서 보면 흥미로운 지점이 많다. 먼저 뱅크런의 원인은 잘못된 소문이라기보다 은행이 자초했다. SVB는 기준 금리 인상에 취약한 장기 국채에 대규모 투자했다. 보통 이런 경우 파생상품을 통해 금리와 관련한 리스크를 헷지하기 마련인데 이러한 대비는 하지 않았다. SVB가 왜 그렇게 무모하게 자산을 배분했는지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위기 상황을 공식화 하는 과정에서도 의문은 이어진다. SVB는 지난달 8일 채권 자산 매각과 이에 대한 손실을 보전하기 위한 증자 계획을 스스로 공시했다. 월스트릿저널(WSJ)에 따르면 골드만삭스가 컨설팅을 했다고 하는데 이상한 결정이다. 뱅크런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공시 전에 은행들의 최종대부자인 연방준비제도(FRB·연준)에 급전을 요청하는 것은 어땠을까.
이후 모두 아는 것처럼 뱅크런이 발생했다. 마이클 바 연준 부의장이 최근 의회에 출석해 발언한 내용을 참고하면 9일에만 420억달러의 고객 예금 인출이 발생했다고 한다. 이는 SVB 총 예금 1,754억달러의 25%에 달하는 수준이다. 하루에 이정도의 돈이 빠져나가면 버틸 수 있는 은행은 없다. 다음날인 10일에는 예금 인출 요구액이 1,000억달러를 넘었다는 설명이다.
또 다른 흥미로운 점은 예금 인출의 속도다. 일반 상업 은행이라면 수천명의 고객들이 접속하기 때문에 서버가 마비돼 돈이 이렇게 빨리 빠져나가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 SVB에서는 가능했다. 이를 두고 모바일뱅킹이 SVB 파산의 주범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다만 SVB의 경우 주고객이 벤처기업들이기 때문에 거액의 예금을 갖고 있는 큰손들이 한 번에 대규모 자금을 빼간 결과로 보인다.
파산 과정도 다이나믹하다. 채권 매각을 공시한 것이 8일이고 다음날인 9일 뱅크런 위기 발생, 이후 하루만인 10일 파산했다. 사태가 터지고 다른 은행들로 번지지 않을까 우려하는 상황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방불케 했다. 실제 시그니처은행도 같이 뱅크런 피해를 입고 폐업했으니 우려가 생길만 하다.
이후 정부와 연준의 대응은 시장의 불안을 키우는 효과도 있었다. 금융당국은 주말 동안 매우 신속하게 대응책을 발표했는데 일각에서는 ‘정부가 저렇게 빨리 움직이는 것은 상황이 정말 나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다만 이와 관련해서는 대처 가능한 문제를 빨리 잡은 결과로 보인다. 투자 담당자가 아니라면 어떤 상품인지 알기 힘들었던 금융위기 때와 달리 SVB 사태는 국채라는 전통적 자산의 가치가 추락한 결과다. 정부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유동성을 투입하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지 파악이 가능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은행들이 1분기 실적을 발표하는데 SVB 파산 사태가 남긴 상흔이 재무구조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주목된다. 특히 대형은행 중 장기 국채 투자 비중이 높은 것으로 알려진 찰스슈왑은 나쁜 의미에서 이번 분기 실적 발표의 주인공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인 은행들도 이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SVB 파산 사태를 극복하고 대형 은행 실적이 긍정적으로 나오면 최근 바닥 없이 추락한 한인 은행 주가의 반등 포인트가 마련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은행들의 어닝 시즌은 10일 시작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