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식(내과의사·수필가)
마당에 작은 분수대를 하나 설치했다. 조그마한 항아리가 몇 층에 걸쳐 옆으로 기울어져 물이 내려가는 모습이다. 졸졸 물 내려가는 소리도 즐겁고 항아리 모양이 예전 한국에서 살던 집의 장독대를 떠올리게 하여 정겹게 느껴진다. 마당 한쪽에는 보통 크기의 항아리가 하나 놓여 있다. 별로 눈길을 주지 않고 있었는데 이번에 다시 보니 분수하고도 잘 어울린다. 돌아가신 어머님이 생전에 사다놓으신 것이다. 한국의 어머님 세대에게 항아리는 필수품이었다. 일 년에 한 번씩 김장을 할 초겨울이면 나는 마당의 흙을 파서 큰 항아리와 작은 것을 땅 속에 묻고 그 위에 김치가 얼지 않게 가마니를 항아리 입 크기는 잘라내고 덮는 일을 한 기억이 있다. 동네 아주머니들과 김장을 해서 항아리에 가득 채워 넣는 날, 또 장독대에서 장을 항아리 에 담그는 날이면 어머님은 행복해 하셨다. “한 겨울, 한 해는 맛있게 지내리라.”
보통 가정에서 쓰는 옹기로는 독, 항아리, 뚝배기 등이 있다. 옹기는 크게 질그릇과 오지그릇으로 나뉜다. 질그릇은 진흙만으로 초벌구이를 한 그릇으로 잿물을 입히지 않아 윤기가 없고 겉이 거칠거칠하고 오지그릇은 질그릇에 유약을 입혀 다시 구운 그릇으로 윤이 나고 단단하다
옹기는 적어도 1200~1300도라는 높은 온도에서 구워지는데, 800도 이상에서 나타나는 루사이트 현상에 의해 옹기 재료에 포함된 결정수가 열을 받아 빠져 나오면서 옹기 벽에 미세한 구멍이 남는데 그 크기가 산소보다는 크고 물방울 보다는 작다. ‘옹기는 숨을 쉰다’는 말은 이 때문이고, 물보다 작고 산소보다 큰 소금이나 설탕이 옹기 표면으로 흘러나와 맺히기도 하는데 이를 ‘옹기가 땀을 낸다’고 표현되었다. 간장, 된장 등은 소금이 너무 빠져 나가면 안 되기 때문에 질그릇 대신 오지그릇을 사용한다, 오지그릇은 바람은 통해도 물은 통하지 않는다. 옹기의 배불뚝이 형태는 햇볕을 골고루 받아 용기의 상하 부위 온도차를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며 여러 개를 나란히 붙여 놓아도 아래 부분에 빈 공간이 생겨 바람이 잘 통한다.
이러한 구조적 특성 때문에 음식물을 자연발효 시켜 맛과 신선도를 장기간 유지시키는 역할을 하는데 적합하다. 옹기의 대표되는 항아리는 간장, 된장, 고추장을 저장하는 용도 외에, 김장 김치, 물 항아리, 곡식 저장용기로 사용되었다.
소금은 음식의 간을 조절해주는 반면 간장은 음식에 깊은 맛과 향을 더해주는데 간장의 신맛·단맛·짠맛·쓴맛·감칠맛 등을 나타내는 물질의 주체는 녹아있는 아미노산이다. 필자는 간장과 된장이 만들어 지는 과정이 항상 궁금하였다. 콩을 삶아 메주 덩어리를 만들어 놓고 따뜻한 곳에 두면 우리의 일반 환경 속에 있는 미생물, 특히 곰팡이가 메주에서 왕성하게 자란다. 각종 미생물이 단백질분해 효소뿐만 아니라 당 분해 효소, 지방 분해 효소 등을 동시에 메주 속에 생산해준다. 그 다음 소금물에 메주를 넣어 두면 메주 속의 효소가 녹아 나와 콩 단백질에 작용해 서서히 분해를 일으킨다. 콩 단백질이 분해되어 많은 아미노산이 녹아 나올수록 간장 맛은 좋아지며 질 좋은 간장이 된다. 숙성 후 걸러서 남는 부분을 된장으로 사용한다. 간장이 검은색이 되는 것은 당과 아미노산이 결합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한편 재래식 메주에 번식하는 곰팡이 중에 누룩곰팡이와 비슷한 ‘Aspergillus flavus’라는 종류가 자라 맹독성 발암물질인 아플라톡신(aflatoxin)을 생성하는 것에 대한 우려가 있다. 간장의 숙성과정 중에 아플라톡신이 분해돼 그 양이 허용 기준치 이하로 줄어들어 인체에 큰 영향은 미치지 않는다는 연구결과가 있지만 시판되는 메주 중에 자주 기준치 이상이 검출돼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다. 서양인들이 간장과 된장을 싫어하는 이유는 기호성의 문제도 있지만 이런 곰팡이 독소를 걱정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의 전통가옥은 대부분 부엌과 가까운 집 뒤 높직한 곳에 장독대를 두었다. 장독대에 그 집의 웬만한 세간사리가 다 얹혀있었는데 그 종류도 다양하였다. 큰 독, 항아리, 단지, 동이, 떡시루, 약탕기 등이 정겹게 놓아져 있었다.
진흙으로 빚어지는 항아리의 가치는 들어가는 내용물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 인간도 마치 연약한 질그릇과 같다. 그러나 생각하는 그릇이다. 우리 안에 무엇을 담느냐에 그 사람의 가치는 달라진다. 좋은 것을 담을수록 귀한 존재가 되고 그 향기는 흘러나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