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진(서울경제 실리콘밸리 특파원)
윤석열 정부가 조만간 파격적인 저출생(저출산) 대책을 예고했다. 지난해 합계출산율이 0.78명으로 역대 최저를 기록한 가운데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위기의식의 발로다. 현재 거론되는 내용으로는 여성의 경력단절 문제 최소화를 비롯해 출산 가구에 대한 세액공제 등이 주를 이룰 것으로 예상된다.
저출생 관련 대책을 예고하는 기사들을 살펴봤다. 기사 댓글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여론은 ‘주69시간 일하게 하는 나라에서 누가 자식을 낳아 기를 것인가’ 하는 내용이다.
최근 국민적 반대 여론에 정부가 급하게 철회한 주 최대 69시간 근로제에 대한 여파로 보인다. 결국 주52시간 근로제가 시행되는 지금도 내 아이를 돌볼 시간이 없는데 정부가 사실상 주69시간 일하는 것으로 강제한다면 어떻게 아이를 낳고 기르겠느냐는 말이다.
과연 높은 근로시간이 문제일까. 이 같은 반대 논리에 응당 소환되는 곳이 미국 실리콘밸리다. 미국의 법정 근로시간은 주40시간이지만 근로시간 최대 상한을 규제하고 있지는 않다. 특히 많은 빅테크와 스타트업이 치열하게 일하는 실리콘밸리는 근로시간이 많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지난해 미국 전체의 합계출산율은 1.7명대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의 두 배에 달하는 수준이다.
워킹맘으로서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면서 이곳의 출산율은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본격적인 공교육이 시작되는 만 5세 이전까지 모든 돌봄 비용은 가정이 부담한다.
취학 전 아동들의 어린이집 돌봄 비용을 지원하는 우리나라와 달리 어린이집에 해당하는 프리스쿨 학비는 살인적이다. 월 2,000달러(약 260만 원) 이상의 수업료 부담과 높은 베이비시터 비용으로 돌봄 초기 부모의 경력단절도 흔하다. 다만 희망이 있다. 기업에서 경력에 대한 공백을 크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곳은 공사 구분이 없어요.” 실리콘밸리에서 만난 이들에게 출산과 육아에 대한 생각 차이를 묻다가 듣게 된 답변이다. 구글에 다니는 한 엔지니어는 “아이들이 등하원할 때 필요한 픽업 시간에 대해서는 팀에서 인지를 하고 있다”며 “이 시간대를 빼고 미팅이나 회의를 잡는 것은 배려가 아니라 당연한 매너”라고 말했다.
가정의 영역으로 여겨지는 돌봄에 있어 핵심적인 부분은 일과 동등하게 중요할 수 있다는 존중이다.
단순히 아이 돌봄에 그치지 않는다. 부모·반려동물 등 돌봄의 영역은 다양하다. 심심찮게 나오는 사무실 출근 지침이 시행되기까지 최소 몇 달 이상 걸리는 것 역시 가정 내 일과를 재배치하고 새로운 환경에 맞춰 안착시킬 수 있도록 일종의 ‘소프트랜딩’을 위한 장치다.
결국 가정 내 돌봄을 양지로 끌어올리고 이에 대한 공감대를 직장과 사회에서 이뤘다는 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육아휴직 기간을 얼마나 길게 주는지, 세액공제를 얼마나 해주는지도 중요하지만 이는 다음 문제다. 직원이 돌봄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늘 인지하고 존중하는 태도가 선결될 필요가 있다. 기존에는 ‘공사를 구분하라’는 오랜 불문율 속에 돌봄의 영역은 개인이 해결할 문제로 치부했다면 생각의 전환이 필요한 부분이다.
직원이 출산과 돌봄의 과정을 거치고 난 뒤에도 이전과 다를 바 없는 것을 요구하면 돌봄은 음지로 갈 수밖에 없다.
부모가 빠진 돌봄은 조부모의 돌봄 노동 또는 베이비시터로 채워진다. 부모가 가장 필요한 시기의 아이들에게는 주말 부모와 늘 일과 가정의 양립 속에 쩔쩔매는 부모만 있을 뿐이다. 오랫동안 프로페셔널에게 요구됐던 ‘공사 구분’의 신화를 재정립해야 할 순간이다.
이는 현재의 저출생에서 그치지 않고 미래 세대의 저출생 문제와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당장 지금 태어난 아이들이 커서 어떤 부모가 될지, 출산과 돌봄이라는 선택지에 대한 첫인상은 현재의 부모 모습이 결정한다. 0.78이라는 수치라도 사수하기 위한 실마리가 여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