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니카 이(심리상담가)
누구나 한번쯤 해봤을 질문이다. 발달심리학에서 ‘선천적인가, 후천적인가(Nature or Nurture)’란 질문처럼 다양한 토론을 이끄는 흥미로운 주제다. 어떤 이들은 ‘사람이 절대 안 변하죠’라고 강한 어조로 답할 것이다.
‘30-40년 만에 옛 동창들을 만났는데 안 변했네’란 경험이 내게도 있다. 가까운 배우자나 자녀가 회심하거나 큰일을 통해 변한 듯싶더니 얼마 못 가서 옛날로 돌아가는 걸 본 사람들은 ‘안 변한다’에 한 표를 던질 것이다. ‘제 버릇 개 못준다’ 또는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란 속담을 보면 옛 성현들도 이 주장에 힘을 싣는 듯하다.
이 질문은 심리상담사인 내가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다. 그렇다면 나의 의견은? 무엇을 변화로 보는지, 그리고 어디에 초점을 두느냐에 따라 답이 ‘아니오’가 될 수도 있지만, 큰 의미 안에서 나의 답은 “네, 변합니다”이다. 만약 ‘사람이 절대 변하지 않는다’면 한시간 동안 겨우 1-2명을 만나는 상담 일은 얼마나 큰 시간적, 물질적 낭비인가? 그러나 감사하게도 지난 십여년 동안 사람의 내면 깊은 곳을 만나온 나의 경험은 ‘사람이 변한다’에 한 표를 던진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타고난 생물학적인 기질과 성격이 있다. 연구에 의하면 어떤 아기는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감정을 더 잘 느낀다고 한다. 그래서 기질적으로순한 아이 40%, 까다로운 아이 10%, 더딘 아이 35% 등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만약 타고난 성향과 기질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면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변화는 ‘치유와 성장’을 함께 품는다. 치유는 원래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다. 우리는 성장하면서 생존을 위해, 상처에서 자신을 보호하려고, 또는 사랑받기 위해 적응된 기재들이 있다.
어린 시절에 양육자의 부재로 방치되었거나, 자주 다투는 부모의 관계를 늘 살피던 아이는 다른 사람의 감정과 필요에 아주 예민해져서 타인의 칭찬과 사랑 받는 법을 습득하며 생존해왔다. 사람들은 그를 ‘착한 아이’로 칭찬하지만 정작 본인은 자신의 필요와 욕구는 묵살한 채, 남의 필요를 채우며 사느라 ‘나’를 잃은 공허함과 우울함을 경험한다.
어린 시절에 트라우마나 학대를 경험한 경우, 자신의 기질과 성격을 억누르고 다른 사람의 옷을 입고 살게 된다. 세상과 사람을 믿지 못하고 경계심이 높고 친밀한 관계에 불편함을 느껴 가까이 오면 밀어낸다.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을 ‘까칠하다’ 또는 ‘방어적/이기적’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갑옷 때문이다. 생존을 위해 입은 갑옷과 역할들이 내가 아니라 그 속에서 온전히 살아있음을 느끼는 자신의 기질, 생각, 감정, 신념과 신체 감각을 만나는 것이 치유이다.
반면 성장이란 아직 개발되지 않은, 또는 잃어버린 부분들을 조금씩 확장시키는 변화이다. ‘이게 나야’라고 자신을 틀에 가두는 게 아니라, 불편하고 어색하지만 반대의 성향들을 시도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외향적이라면 혼자만의 시간을 더 가진다든가, 너무 이성적이라면 감정을 알아차리고 공감하는 연습을 시작하고, 평생 머리 쓰는 일을 했다면 등산이나 춤, 운동 등 몸 쓰는 일을 늘리기 등이다.
변화를 만들어가는 일은 과정이지 어느 날 다 완성된 결과가 아니다. 아주 작은 변화에 눈길을 주고 칭찬과 격려의 먹이를 주면 그 변화는 점점 더 큰 용기와 힘을 얻게 된다. 치유와 성장을 향한 변화는 결코 쉽지 않지만 시간과 노력을 기울일 충분한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는 모든 것이 용납되고 자유로운 우주가 들어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