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가 일본과의 최대 외교현안인 강제동원(징용) 피해자 배상문제에 대해 6일 발표한 공식적인 해법에 후폭풍이 거세다. 우리 국민들을 강제 동원해 노역을 시켰던 일본 기업들이 피해자에게 배상하지 않고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 지원재단이 국내 기업으로부터 ‘자발적으로’ 출연한 기금으로 조성한 재원으로 배상금을 지급하는 이른바 ‘제3자 변제방식이 정부가 밝힌 해법이다.
실질적으로는 우리가 일본기업들의 책임을 대신 져주는 ‘셀프 배상’에 다름 아니다.
그동안 윤석열 대통령은 일본과의 관계개선에 대해 조급증을 보여 왔다. 지난해 9월 뉴욕 유엔총회를 계기로 열렸던 한일 정상 간의 만남은 윤 대통령이 기시다 총리의 행사장을 찾아간 끝에 불과 30분 만에 끝나 ‘굴욕외교’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리고 그런 조급증은 이번 발표로 다시 한 번 확인됐다. 발표가 있기 전 주무부서인 외교부는 일본 쪽의 보다 성의 있는 조치를 얻어내야 한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또한 원로 보수인사들조차도 너무 서둘러서는 안 된다며 속도조절을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발표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무엇보다도 피해자들의 입장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피해자들의 입장을 대변해야 할 한국정부가 먼저 나서 일본 가해기업들의 사법적 책임을 면책시켜준 형국이다.
또한 식민지배의 불법성과 전범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책임을 인정했던 지난 2018년 대법원의 판결도 부정하고 있다. 사법부의 판단을 행정부가 이렇게 자의적으로 부정할 수 있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배상과 관련해 한국은 일본에 외교적으로 호된 되치기를 당했던 경험이 이미 있다. 지난 2015년 발표된 위안부 문제 합의 때 “한국은 해외 소녀상과 기림비 건립을 지원하지 말아야 한다”는 등의 이면합의가 존재했던 것으로 밝혀져 큰 파장이 일었다.
합의에 ‘불가역적’이라는 표현이 들어간 과정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본래는 ‘되돌릴 수 없는 사죄가 돼야 한다’는 뜻으로 이 문구를 넣을 것을 주장했지만 일본의 되치기에 걸려들면서 이 문구는 ‘되돌릴 수 없는 최종적 합의’라는 뜻이 돼 버렸다. 묵과할 수 없는 굴욕적인 합의였다.
그런데 이번 징용 해법에 대해서는 “위안부 합의보다도 못하다”는 거센 비판과 반발이 일고 있다. 그래도 당시 위안부 합의에는 ‘마음으로부터의 사죄와 반성’이라든가 ‘일본정부 예산 10억 엔 거출’ 같은 최소한의 성의나마 들어가 있었지만 이번에는 아예 그런 것조차 찾아 볼 수 없다.
이런 해법이 나온 데는 기본적으로 윤 대통령의 의중이 가장 크게 작용했겠지만 대통령의 일부 최측근 인사들의 입김과 영향도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인사들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사람이 석동현 민주평통 사무처장이다. 대통령의 40년 지기로 일컬어지는 검사 출신 석동현 사무처장은 “안보를 위해서는 일본과 잘 지내야 하고 그런 점에서 나는 친일파가 되겠다고”고 공공연히 말해왔다.
지난달 미국을 방문했던 그는 한 강연회에서는 “내가 전문가들을 모아 윤 대통령의 3.1절 기념사에 담길 메시지에 대해 건의를 했다”고 밝힌바 있다. 논란을 일으킨 대통령의 3.1절 기념사와 이번 발표 내용을 보니 무엇을 건의했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한국정부가 징용 배상 문제를 이처럼 서둘러 봉합하려 한 데는 한미일 안보 공조에 대한 바이든 행정부의 채근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분석과 추측이 나오고 있다. 해법 발표 후 곧바로 윤 대통령의 미국 국빈방문 발표가 나온 게 우연으로만 보이지 않는 까닭이다.
해법이 나온 배경과 대통령의 소신이 무엇이든 간에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을 뒤바꿔놓은 일방적인 합의는 ‘역사의 정의’라는 관점에서 타당성을 부여받기 힘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