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자(시인·수필가)
이른 아침, 언제나처럼 겨울 숲을 찾아 나선다. 겨울이 짙게 깔린 숲 속 벤치에 겨울 햇살이 포근하게 내려 앉는다. 느티나무 마른 가지에도 보드랍고 평안한 햇살이 일삼아 찾아 준 것 같은 몸짓으로 흡족한 일면식을 나눈다. 짐짓 빈 가지 사이사이로 비끼는 햇살이 겨울 숲의 목마른 냉기를 목도리처럼 둘러준다. 다 비워버린 맨몸으로 하늘을 받들며 올곧게 빈 가지를 뻗어내고 있는데 무참한 매서운 겨울 바람이 빈 가지들을 흔들어댄다. 다 비워낸 겨울 나무는 유유자적 신명에 실려 리듬에 겨운 듯 자유를 펄럭이며 나붓나붓 흔들어댄다. 서로를 부축하 듯 하늘 우러러 푸르렀던 날들을 기억하며 빈 둥지를 받들 듯 지키고 있는 전설같은 적막이 맴도는데 바람은 몸부림으로 메아리를 쏟아낸다.
앙상한 가지들을 뻗고 있는 나목들이 겨울 산을 지키고 있다. 나목을 대하는 시선 또한 각색각양이다. 시인의 눈길에서 빚어져 나온 시의 울림도 시인마다 가감지인의 자태로 그려질 것이요, 유능한 사진작가의 시선에 사로잡힌 빈 가지의 뻗음을 선과 선들로 각색해낸 사진 예술의 극치 매혹에 매료될 수 밖에 없는 작품이 탄생할 것이다. 화가의 촉에 붙들린 절정에 이른 겨울 나무 정경을 심미안에 아우르며 정서의 흥취를 캔버스에 옮겨놓기 위해 화가는 끝 없이 소재의 배경을 찾아 헤맬 것이다. 음악 만드는 일을 사명 삼고 있는 음악인들은 감흥을 느끼는 것에, 심령에 와 닿는 멋을 읊어내는 선율이 오선지를 메워갈 것이다. 옛 야사에서나 만날 법한 나무꾼들은 ‘실한 장작들이 지천이로세’ 도끼를 만지작거리며 손바닥에 침을 바를 터이다. 이처럼 같은 사물을 대하는 시선이나 태도가 하나같이 차이가 있고 구별이 있고 다른 것이 세상을 사는 멋이겠다.
인생은 마치 숲을 거쳐 지나가야 하는 노정처럼 곧은 길도 지름길도 없는 구불구불한 길의 전개이다. 초록으로 울창했던 시절을 지나, 다 내려놓은 앙상한 빈 가지들을 드러내는 시절 앞에 섰다. 계절 순환이 불러낸 봄이 찾아 들면 나무 가지는 다시 소성하고 푸르른 여름이 연출되고, 비움의 가을이 도래한다. 겨울이 모질수록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위축감이 들기도 하지만 봄은 기어코 연록의 잎새들로 초록 향연을 펼쳤고, 무성한 숲을 이루며 겨울 나목에 이르기까지 그 모습을 기억해두라 한다. 대자연의 한 몫으로 충실해 왔던 것인데 초라하고 빈 나무라며 함부로 업신여김으로 대하지 말아달라는 비명같은 소요가 우리네 인생들의 옛 모습과 훗날 모습을 돌아보라는 견책을 일깨워 주고 있다.
보여지는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경망한 시대상을 일깨워주고 있음을 본다. 겉모양이 전부가 아닌 것인데. 인생에 대한 평가를 단순히 일시적으로 보이는 모습으로 쉽게 판단하다 보면 자만에서 기인된 교만으로 때로는 스스로를 자학하게 되는 착각을 범하게 된다. 겨울 나무의 고고하고 강직한 자태는 먼 태고적부터 숭고하게 이어져온 존엄한 자연의 신비다. 만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올곧게 가꾸어야 한다는 꾸짖음을 듣는 것 같다. 만물이 있기 전 모습과 그 과정과 지금에 이른 결국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겉모습 만으로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는 의연한 경고음이 장황하다. 매서운 겨울 바람과 맞서고 있는 과묵한 결연을 보게 된다.
울울창창 무성한 초록으로 가려주었지만 잎새를 떨구어 버린 겨울 나무는 기어코 건너편 산야까지 훤히 볼 수 있는 경지를 잠깐이나마 맛보게 해주는 미덕까지 밝히 피력해 주었다. 갈 잎으로 갈아입은 상록수와 빈 가지들이 구상해낸 극치의 예술품에 바람과 햇살이 배경이 되어 주었다. 비움과 내려놓음이 어우러진 최상의 정취를 인생들과 공유하려는 경지가 두드러지게 돋보인다. 더는 고갈될 것도 없는 기력이 쇠하여 가는 겨울 나무들. 모진 바람에 시름없이 시달리며 빙판 같은 차가운 하늘을 빈 손으로 하늘 무게를 받들고 있지만 안으로는 여린 생명을 키워내고 있다. 더는 가진 것 없는 정직한 두 손 들어 올려 무한 창공과 마주하며 기도하는 나목은 천상 기도로 지새우는 우리네 어머님 모습이다.
겨울 나무는 침묵에 잠겨 있을 뿐이지만 다가올 계절로 하여 생동하는 생명력의 잉태를 드러내지 않는 은은한 추세만으로도 인류에게 희망과 기백을 덧입혀 주고 있다. 겨울 나무는 더 이상 텅 빈 나무가 아니라며 빈 가지들의 충만을 즐기고 있다. 살아간다는 게 스산하고 힘겨워도 겨울 나무처럼 기다리며 인고하는 인생들에게는 소망의 훈기가 다가올 것이다. 겨울 나무는 조용히 지는 해 노을을 배웅하고 있다. 달관과 의연을 품은 겨울 나무의 마지막 풍경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