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자(전 숙명여대미주 총동문회장)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날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끝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내리고
매화 향기 가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리
다시 천고 뒤에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시, 이육사 '광야' 전문)
이육사의 시로는 ‘청포도’가 잘 알려진 시다. 민족 해방을 가슴에 안고 달려온 시인으로 유명하다. 그의 시는 자연을 전설처럼 가슴에 안고 맑고 깨끗한 자연의 이미지 하늘, 푸른 바다, 청포의 푸른 돛단배, 모시 수건 자연이 곱게 가슴에 밀려온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마음의 눈에 새겨진 마음씨 고운 매운 계절의 채찍이다.
‘어디 닭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차마! 이곳은 범하진 못하였으리라’ 조용히 잠든 서민의 마을의 평화를 깨지는 못하였으리라. 육사의 가슴에는 거대한 산맥같은 목마를 타고 찾아온 초인도 있었지만 조용한 마을 평화롭게 잠든 처음 하늘 마음씨 가난한 서민 사랑이 그 시의 위대함이다. ‘강에 사람이 모여 길을 만들었다.’ 인간의 광야의 역사를 숱한 세월이 흘러도 인간의 역사는 광야에서 시작되었음을 노래한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시인의 고결한 선비의 삶, 눈내리는 고향마을 집 뒷뜰에 겨울을 이기고 눈속에 핀 매화 향기에 젖은 시인의 가슴이 얼마나 높고, 맵고, 깨끗한가. 그 옛날 초인은 누구며, 백마는 무엇이었나… 육사의 가슴에는 언제나 조국이었다. 육사라는 그의 이름도 감옥살이 시절 그의 가슴에 붙인 수인 번호였다니. 조국 광복을 기다리는 초인은 백마를 타고 온다고 그의 불타는 애국심이 시에 녹아있다. 조국을 잃은 슬픔을 광야, 청포도에서 그가 기다리는 초인은 자기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해방둥이인 나는 민족잃은 한의 설움을 잘 모르지만 시인 윤동주, 이육사, 수많은 시인들이 한을 가슴 안고 옥중에서 죽어갔다. 일제 압박의 채찍을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개’로 비유하고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이라 그때 그 아픔을 노래하고 있다. 육사는 끝내 평생 민족 해방, 독립을 위해 싸우다가 옥사했다. 일제로부터 독립을 위해 목숨 버린 위대한 시인들이 그 아픔을 살지 않았다면 우린 그리 쉽게 일제의 손아귀에서 해방될 수 없었으라…
자유를 품에 안은 오늘의 대한 민국은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토록 민족의 큰 어른들이 생명바쳐 찾아낸 우리 조국 대한민국은 지금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의 감옥에서 유서처럼 남긴 시가 '꽃'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방울 내리지 않는 그 땅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북쪽 둔드라에 찬 새벽은
눈속 깊이 꽃 맹아리가 움작거려
제비떼 까맣게 날아오르길 기다리니
마침내 저바리지 못할 약속이여!
한바다 복판 용솟음 치는 날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 성에는
나비처럼 취하는 회상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보리라. (옥중에서 유서처럼 남긴 시- 이육사의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