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희 목사
노년기의 시작을 언제쯤으로 봐야 할까요? 20대였을 때 저는 60세만 되면 노인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30대가 되면서 70세가 노인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 나이가 지금 60세가 넘어서면서 80세가 되어야 노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나라 노인 복지법에서는 65세를 보편적으로 노인으로 생각을 합니다. 미국은 55세부터라고 합니다.
우리가 삶을 살면서 많은 부분에 편견을 갖지만 그 중 노인에 대한 편견은 상당히 많습니다. 노인이 되면 더 이상 쓸모 없는 존재가 된다. 더 이상 사회에 기여할 수 없는 연령의 시작이다. 그럭저럭 여생을 보내다가 죽어야 하는 시기이다. 혹은 노망이 시작되는 나이이며 건강은 나빠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해야 하는 시기이다. 더 이상 배울 수 없는 시기, 더 이상 사회를 향해서 생산적 기여를 할 수 없는 연령이다라는 깊은 편견과 사회적 통념이 우리를 지배하고 잇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신화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노인은 재발견되어야 합니다. 마치 어린이가 존중되어야 할 한 인간으로 다시 발견된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날 어린이들의 인격적인 위치는 무척 격상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최근에 와서야 비로소 이루어진 일입니다.
계몽주의 시대 이후 에밀이나 루소같은 교육철학자에 의해서 어린이도 하나의 독특한 개성을 지닌 인간으로서 존중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부각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른들의 부속품이나 그들에게 예속된 존재로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이 하나의 인격을 지닌 인간이라는 사실이 발견되고 강조되었습니다. 이렇게 어린이를 인간으로서 발견한 것처럼 우리는 노인을 인간으로서 다시 발견해야 할 과제 앞에 서 있습니다. 이를 위해 노년기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노년기란 첫째로 손실의 계절입니다. 일반적으로 노년기에는 신체적, 사회적, 경제적, 정신적으로 손실이 오게 됩니다. 그런데 노년기의 신체적 상실의 모습을 놀랍도록 인상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성경의 본문이 있습니다.
전도서 12장3절은 “그런 날에는” 으로 시작합니다. 이는 노인의 계절을 가리킵니다.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이는 집을 지키는 노인들이 수족을 떨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중풍과 신경쇠약에 걸린 노인들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힘없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젊을 때 힘있던 사람들도 노인이 되면 허리가 굽고 무릎이 흔들거리기 시작해 층계를 올라가는 것이 여간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맷돌질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이가 빠지므로 음식을 씹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창들로 내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창문이 어두워 진다는 것은 시력이 악화됨을 말합니다.
또 4절을 보면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길거리의 문들이란 귀를 의미합니다. 청각이 둔해지는 것입니다. “맷돌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다시 치아에 대한 언급입니다. “새의 소리를 인하여 일어날 것이며” 노인이 되면 새벽잠이 없어져 새 소리만 들어도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음악하는 여자들은 더 쇠약해질 것이며” 성대의 노쇠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5절에 보면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하늘을 두려워 하게 됩니다.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 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살구 나무에 꽃이 핀다는 것은 흰 머리가 생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힘이 없어져 지팡이를 짚어야 할 뿐더러 메뚜기조차 짐으로 느껴지게 됩니다. “원욕이 그치리니” 식욕과 성욕이 감퇴하기 시작합니다. 또 6절을 보시면 “은줄이 풀리고” 이것은 신경을 연결하는 척수가 쇠약해지는 모습에 대한 묘사입니다.
이렇게 하여 전도서 12장에서는 노인들의 삶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