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정
경기도 이천이 고향인 외할아버지는 그 옛날 소학교 한번 다녀보지 못한 농사꾼 이셨습니다. 지금으로부터 근 반세기 전 할아버지는 등에 지게를 지고 산에서 나무도 해오시고 대문 옆 한쪽에서 작두로 짚을 자르며 소가 먹을 여물도 마련하셨습니다. 제가 여섯 살 무렵에는 직접 화투를 가르쳐주셨고 제가 심심하다고 칭얼대는 날에는 화투놀이의 상대가 되어주셨습니다. 또 할아버지는 농한기에도 사랑방에 앉아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두 손이 쉴 새 없이 새끼를 꼬아대셨습니다. 근면한 성품 덕에 머슴들까지 두고 사셨던 할아버지는 땅을 늘리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지 돈을 쓰는 일엔 인색하셔서 밖에서 밥때가 지나도록 끼니 한번 사드시고 들어오는 일이 없으셨습니다. 게다가 글공부에 목이 마르셨던 할아버지는 하루 한 장씩 뜯어서 보는 얇은 달력종이를 모아두셨다가 종이의 여백에 끊임없이 한글을 연습해가며 배우기를 쉬지 않는 만학도이기도 하셨습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들어간 지 두 해쯤 되었을 무렵, 할아버지는 이천 고향을 뒤로 한 채 서울로 이사하셔서 어린이대공원 가까운 곳에 이층 양옥집을 짓고 사셨습니다. 그리고 변함없이 고향 땅에서 드리시던 제사를 이어가셨습니다. 제사 다음 날 아침이면 할아버지는 제상에 올렸던 알록달록한 사탕과 약과를 제게 아낌없이 내어주시고 또 제사 지내는 일에 반대하는 목사님의 심방 설교에 마땅찮은 듯 굽히지 않는 목소리를 내셨습니다.
일찌감치 2대독자인 귀한 아들을 먼 미국 땅에 떠나보낸 할아버지는 오랜 세월 당신의 아들을 그리워하시다, 9․11이 터지던 2001년에 아들네를 방문하게 되셨습니다. 그보다 여러 달 전 한국을 떠나온 저도 미국에 오신 할아버지와 다른 가족들을 만나러 그 집에 며칠 묵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집밖을 나서면 여기저기 다닐 때가 많았던 할아버지는 미국의 삼촌 댁에선 달리 할 게 없으셨나 봅니다. 하루는 삼촌 집의 창문이 몇 개인지 아느냐고 물으시며 당신이 직접 세어보았노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끼니때마다 드셨던 국을 찾지도 않으셨고 대신 베이글 샌드위치를 군말 없이 씹어 삼키셨습니다. 제가 돌아갈 날이 되어 짐 가방을 들고 나서던 어둑한 새벽에 할아버지는 조용히 방문을 열고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지폐 한 장을 제 손에 쥐어주셨습니다. 조심히 가라는 나직한 말씀과 함께 말이죠. 공항에 도착해서 이른 아침 문을 연 맥도날드가 눈에 띄었습니다. 커피 한 잔을 사고 싶은 맘에 잔돈을 꺼내보려다 할아버지가 주신 돈이 생각났습니다. 꺼내어보니 십 불 한 장. 커피 한 잔 값을 지불하기에 적당한 금액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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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후 엄마와 통화하면서 제가 떠나던 그날 새벽에 할아버지는 십 불짜리 지폐를 백 불짜리 지폐인 줄 알고 제게 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뜩이나 미국 돈에 서투른 할아버지는 잠이 덜 깨셨을 법한 어두컴컴한 새벽에 달러 지폐 두 장을 혼동하시고 내내 속상해하셨다고 알려주셨습니다.
엄마와 통화할 때마다 그날 공항에서 그 십 불을 얼마나 요긴하게 잘 썼는지 모른다고 꼭 할아버지께 전해달라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몇 해가 지나 치매를 앓던 할아버지는 제가 뵈러 갔는데도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셨고 할머니의 뒤를 이어 같은 해에 눈을 감으셨습니다. 다행히 할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한국행 비행기 표를 어렵지 않게 구한 덕에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울긋불긋한 종이에 칭칭 싸인 할아버지가 굵은 줄에 매달린 채 깊은 땅속으로 향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할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뵈면서 내 안에 울려 퍼지는 그 한 마디, “할아버지, 저 진짜 그 십 불 너무 감사했어요.” 그리고 뜨거운 눈물이 양쪽 뺨을 타고 흘러내립니다.
약력
1992 년 연세대학교 아동학과 (학사)
1999 년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2002 년 사우스캐롤라이나 이주
2011 년 알라바마주 이주
2017 년 학교 상담학 (석사)
2018 년 Pre-K 주교사
2022 년 공립학교 시간제 교사
당선소감
우선 제 부족한 글을 읽어 주시고 귀한 상까지 더해주신 애틀랜타 문학회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마감시간에 임박해서 글을 제출하느라 원고를 보내고도 아쉬운 표현들, 문구들이 떠올랐지만 글을 쓰면서 채워지지 않는 이 목마름은 쓰면 쓸수록 더하지 않을까 합니다. 사실 제게 글을 쓴다는 것은 내 안의 나를 돌아보는 거울을 가져다 대고 그 위에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이미지들을 거짓 없이 형상화 시켜야 하는 일이기에 먼저 제 자신 앞에 솔직해져야 하는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글 쓰는 일에 현학적인 태도를 버리라는 어느 작가분의 당부 어린 말씀이 늘 채찍으로 따라 다니기에 한 글자 한 글자 두려운 마음으로
담아내야 했습니다. 이 엄숙한 두 가지 명제 앞에서도 더 이상은 감출 수 없는 제 안의 오랜 이야기를 토해낼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고 손잡아 주신 애틀랜타 문학회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세상 누구보다도 목청이 크셨지만 조금만 칭찬할 일에도 배시시 웃음을 흘리셨던 그리운 할아버지가 하늘에서 이 소식을 듣고 살포시 미소 지을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