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유창 목사(몽고메리 사랑 한인교회)
<두려움>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요, 다른 하나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잠언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경외”라 부릅니다. 그러나,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원어로 “얼굴”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상이한 두 가지의 두려움의 원인과 결과는 확연하게 다릅니다. 잠언의 중요한 믿음의 <핵심 사상>은 “야훼 경외함은 지혜”라는 것입니다. 잠언의 서론과 같은 1장에서 잠언서의 기자는 “지혜”를 확신에 찬 말씀으로 전합니다. “야훼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1:7). 그리고, 더욱 더 확신에 찬 말씀으로 <지혜에 대한 명료성>에 쐐기를 박습니다. “야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9: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혜의 분명한 진리에 <무관심>하고 <무지>했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끊임없는 경고와 교훈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영적무지>와 <고집스러운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것에 대하여 <최후 통첩한 지혜의 말씀>이 잠언 29:25~26의 말씀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야훼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주권자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으나 사람의 일의 작정은 야훼께로 말미암느니라.” 이 말씀의 논지는 “두려움과 올무”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자는 야훼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야훼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전자의 결과는 <올무>에 빠지게 되고, 후자의 결과는 <안전>이 보장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결정적인 해법의 실마리는 잠1:18의 말씀입니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게 되느니라”. 묵시는 히브리어로 “하존(Hazon)”입니다. 하존의 의미는 “묵시, 계시, 비전, 꿈”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존이라는 말의 의미를 “선지자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사1:1). <묵시>가 없다는 것은
<꿈>이 없다는 것인데 이것은 단순히 꿈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무시한다’>는 말입니다. 사람을 두려워 하는 자의 말로(末路)는 “올무에 빠지게 됩니다(25절).” 꿈이 있는 자의 구체적인 영적 반응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그 두려움 속에는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우선순위에 두고 진실로 <야훼 경외함과 존중함>이 그 마음 중심에 서 있습니다. 그러한 자에게는 하나님께서는 축복하시되, <안전의 축복>으로 보호하시겠다 약속하십니다(잠29:25). 그러나 꿈이 없는 백성이 되면, “방자히 행하게 된다” 하셨는데, 그 의미를 호세아 선지자는 “내 백성이 지식(묵시, 계시, 비전, 꿈)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4:6)라고 예언합니다. 과연 이스라엘은 역사 속에서 바벨론 유수 70년의 비참한 비극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묵시를 깡그리 무시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버리고 사람을 두려워 한 결과, 그들은 “노예의 올무”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신약시대에 와서 사람의 겉모습을 보고 외모에 빠져 두려움에 헤어나지 못하여 인생일대의 최고의 후회를 남긴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하여 예수님의 극찬을 받은 예수님의 수제자입니다(마16:16). 그랬던 그가 <인간의 양면성>의 적나라한 민낯을 보이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마 26:69~75에 보면, <베드로의 예수님 부인>의 세밀한 기록이 나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인 체면은 깡그리 무너지고, “사람을 두려워함이 하나님을 두려워함 보다 더 우선순위”에 있게 됨으로써 마침내 대성통곡하며 가슴을 치며 후회하는 “올무”의 뼈저린 체험을 하였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마26:75).” 야훼 경외의 중심이 상실되면, “망하는도다”의 말씀의 화살을 피할 수 없습니다. 잠언 기자가 말한 올무는 한 개인이나 국가가 완전히 멸망하여 그 존재 자체가 지구상에서 소멸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나니.” 경외(敬畏)는 축복의 길을 걷게 되지만, 사람의 얼굴에 대한 두려움은 올무의 사슬에 묶여서 <욕심과 압박의 노예, 비합리의 노예, 불안정성의 노예>로 전락합니다(시146: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