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모세(애틀랜타 문학회 회원)
어느덧 단풍이 지고있는 가을의 끝자락에 머물고픈 마음엔 아쉬움이 자리하고 있다. 소슬바람에 물결치는 억새밭의 장관에 늦가을의 정취가 짙어가고 있다. 늦가을의 환상적인 풍경에 경이로움과 자연의 오묘한 섭리를 체험하는 감동의 순간이다. 한때 억새밭을 물들였던 채색의 향연은 이제 빛이 스러지며 쓸쓸한 풍경으로 남아 스산한 데가 있다. 억새밭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던 햇살마저 서쪽으로 기울어져 먼 지평선을 넘어 사라져간다.
가을의 찬바람에 실린 삶의 체관을 담은 첼로 피아노 소나타가 있다.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이다. 슈베르트 작품 세계의 본질은 짙은 우수로 가득 찬 비애이다. 우수에 잠기는 애틋한 슬픔이 배어있는 첼로의 깊은 탄식과 서정적인 피아노의 영롱한 선율이 그지없이 아름답다. 원래 “아르페지오네” 악기는 1823년에 발명된 첼로 몸통의 여섯 줄을 지닌 현악기이었다. 이내 사라져버린 악기로서 지금은 첼로로 연주하는 제목 이름만 유지하고 있다. 가을의 끝자락에서 듣게 되는 현악기 첼로의 애조 띤 선율과 피아노의 맑은 선율이 쓸쓸함을 머금고 가슴을 파고든다. 31년을 단명하게 살다간 슈베르트의 삶은 정신적 경제적 고통 속에서 만년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가 삶에 지치고 힘들었을 그때 그의 일기 한 구절은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나는 매일 잠자리에 들 때마다 다시는 눈이 떠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뜨면, 전날의 슬픔이 밀려옵니다. 이렇게 기쁨도 따뜻함이 없이 나의 하루하루는 지나갑니다.”
참으로 슬프고 가슴 아픈 고백이 아닌가? 진정한 예술의 참 정신은 삶의 고통 가운데서 승화되는 것이 아닐는지? 바흐, 헨델,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쇼팽, 차이콥스키, 브람스 등의 음악은 고통 가운데서 탄생했으며 후대에 인류의 찬란한 문화유산이 되었다.
“바흐” “헨델”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열정과 감사의 마음으로 작곡에 임했다. 고전파 음악가 “하이든”의 삶은 유머와 위트로서 밝음을 지향한 순수음악의 일생이었다.
“모차르트”는 경제적 고통 속에서도 사랑의 순수한 감정을 아름답게 노래하는 기쁨의 삶을 살았다. 그의 천재적인 음악성은 영롱하게 빛을 발했지만 애석하게도 단명했다.
“베토벤”의 위대한 생애는 자신의 운명과 역경을 초극하는 투쟁 정신으로 인류를 위한 승리의 찬가를 제창했던 악성이다.
“슈베르트”는 가난한 처지에서 자신의 삶을 한없이 슬프게 노래했다. 그의 일생은 안타깝게도 짧았지만, 사후에는 사랑의 시정을 노래하는 가곡의 왕이 되었다.
“쇼팽”은 맑은 시심으로 자신의 삶에서 사랑을 아름답게 수놓았던 피아노의 시인이었다.
“차이콥스키”는 우수에 찬 삶을 아름다운 선율로 표현했던 음악으로서 후기 낭만파 음악의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의 삶은 불행의 연속이었다.
“브람스”는 스승인 “슈만”의 부인을 사랑하는 마음의 고통을 내면으로 아름답게 승화시킨 고결한 영혼을 지녔었다. 그의 <현악 6중주 제1번> 2악장의 애절한 선율은 가슴에 켜켜이 쌓인 그리움의 절규처럼 처절하다. “브람스”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며 “클라라”를 향한 순수한 사랑의 마음을 지켰다. “클라라” 사후 그는 충격을 받아 이내 “클라라”의 뒤를 따르게 된다. 그는 음악사에서도 고전파의 음악 형식의 전통을 고수했고 후기 고전파의 명맥을 이어나갔다. 위대한 음악가들의 공통점은 가난한 삶 가운데서 순수음악의 가치를 추구했다는 점이다. 그들의 맑은 영혼에서 격조 높은 예술성의 작품이 탄생했다.
우리가 정신문화의 값진 혜택을 누리고 있음은 훌륭한 음악가들의 고통스러웠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해 감사한다. 순수음악은 삶에 지친 우리의 영혼을 어루만져주며 내면을 순(정)화하고 있다. 고전 음악 감상은 정서함양 차원에서도 삶을 풍요롭게 하는 유익하고 귀한 시간이 될 것이다.
어느덧 늦가을의 낭만을 품은 절경 앞에서 가을의 끝자락에 머물고픈 마음은 자연이 베풀어 주는 교향악에 전율하고 있음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