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자(시인·수필가)
나이든 엄마 귀가 갑자기 들리지 않아 난감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도, 눈에 검붉은 핏발이 어리어 흉한 몰골이 되었을 때도, 발가락 뼈가 부러져 깁스를 해야할 지경을 당했을 때도, 딸네들이 한결같이 부르짖는 구호다. ‘아프면 참지 말고 얘기 해달라’는 애석한 꾸짖음을 듣는다. 아프면 참지 말라고 신신 당부를 한다. 으름장까지 놓으면서. 하지만 복화술로 혼자 중얼거린다. ‘아니야, 아파도 참아야 해, 아프다고 어떻게 일일이 다 알리니, 나 하나 참으면 주위가, 만사가 편한 걸.’ 마음 소리가 들린다. ‘그렇게 하셔도 됩니다’ 하는데 한편에선 그렇게 하면 ‘안돼’라는 소리가 뒷북을 친다.
몸이 아프면 심리적 고통까지 따르기 마련인데 어찌된 일인지 본능에 가깝도록 묵묵히 참고 견뎌내며 내색하지 않으려 할 때가 다반사다. 참는게 능사가 아닌데도, 몸이 아파 오고 마음도 타 들어가다 보면 활동 반경도 무디어지고 잘못되면 기능까지 잃어버리게 되는 것인데도 혼자 참고 넘겨버리려 한다. 마치 아플 권리조차 없다는 듯 미련스레 살아왔다, 왜 아프다고 말하면 안되는 걸까. 그러니까 딸네들로부터 아프면 참지 말라는 걱정을 끼치지 않는가. 구 시대적 과오다. 아프다고 쉽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스스로 나약하다고 인정할 줄 아는 용기를 키웠으면 좋겠다.
아픔에는 순환이 있다. 통증은 몸 속을 돌고 돈다. 의학적 정의는 내릴 순 없지만 아픔은 수시로 삐걱대며 찾아오기도 하고 갑자기 구급차를 불러야 할 만큼 예고 없이 찾아 들기도 한다. 인체 어딘가에 침투하 듯 잠입하고 있다가 필요 충분한 상대적 기회에 느닷없이 표출되고 드러나곤 한다. 산책길을 나서기 전에는 멀쩡했던 발목이 겨우 몇 걸음 뗐을 뿐인데 시큰거리기도 하고 무릎 통증까지 곁들여지면 계속 걸을 수 있을까 싶으면서도, 머뭇거리는 마음을 다스리며 이미 나선 걸음이라 조심조심 걷다 보면 거짓말처럼 통증이 조작된 것 마냥 사르르 가라앉으며 드러나지 않은 적도 있었으니까. 특정 부위의 아픔도 어느 날은 가볍게 때로는 짙게 몰려들기도 한다. 이렇듯 아프다는 것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대기하 듯 위장 잠복하고 있다가 급습하는 스파이 같기도 하다.
나이가 무거워지면서 유년의 할머니가 생각나곤 한다. 어찌 그리도 매일같이 아프다는 말을 쉬지 않으셨을까. 하루는 허리가 아프시고 하루는 손목이 아프시고, 다음 날은 머리가 흔들리신다고 하셨을까. 어쩌면 뒷방 늙은이로 머물기 싫다는 몸부림은 아니었을까. 주변의 관심을 이끌어내려는 방편이셨을까. 아픔을 보물찾기처럼 집착하고 계신 듯 했다. 이렇듯 내 어머니께선 시어머니 수발에 어른을 찾아오시는 손님 수발에 앞치마가 마를 날이 없으셨다.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넌덜머리나는 일을 나 하나만 참고 수고하면 집안이 편하다는 신조 하나만 붙들고 살아오셨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는 눈에 띄이지 않는 수고와 인내가 요구된다는 것을 부모님 둥지를 떠나게 되면서 깨닫게 되었다. 8대 장손 맏며느리 자리를 생각없이 뛰어드는 딸을 그토록 말리셨던 까닭까지도. 숨겨져 있었던 인고를 딸에게 알려주지 않으셨다는 투정보다 빛도 없이 이름 없이 헌신해오신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에 실려 ‘나 하나만 참으면 다 편하다’는 말이 현자의 말처럼 오롯하게 새겨져 있었나 보다.
얼마 전 우연한 자리에서 지인 분으로부터 하소연을 듣게 되었다. 교통사고로 인한 후유증 고통을 털어놓고 피력한 적이 있었는데 그 아픔과 고통을 마치 무언가 잘못된 삶의 귀추로, 죄업으로 인한 벌점을 받은 것처럼, 질책으로 되돌려 받았다는 탄식에 가까운 호소를 듣게 되었다.
역설적 시대가 도래한 것일까. 참담한 반응이다. 아픔을 덜어주지는 못할 망정 소금을 뿌리는 일은 삼가야 하지 않을까. 자신의 안존과 안일 만을 추구하려는, 나만 아니면 된다는 식으로 남의 집 불구경하듯 이기적 추태를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군상들의 민폐로 하여 아픔을 호소하는 것으로 나누어 보려는 시도 자체가 아픔을 배가 시켜버린 아픈 시대상에 마음이 상하고 개탄스럽다.
아픔을 나누다 보면 고통은 줄어들기 마련인 것인데, 위로받고 싶고 기대고 싶은 마음들이 부끄러운 일로 치부되다니. 하지만 지금껏 살아왔던 일상처럼 아픔을 참지만 말고 서로 쓰다듬어 주며 나누며 잘못된 풍조를 밀어내며 함께 가기로 다짐했다. 지금까지 버텨준 육신을 칭찬해 주며 아끼고 보살펴 주자는 권면을 아끼지 않으며, 아픈 몸과 마음들을 안아주며 서로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일에 마음을 다하기로 했다. 힘들면 힘들다고, 아프면 아픈 그대로를 나누어야 할 시대가 새롭 듯 열린 것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눌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으로도 행복의 첩경이 열릴 수 있는 것이니까.
아플 땐 참지만 말고 표현하며 나누며 살아가는 세상으로 만들어 가자며 두 손 꼬옥 잡고 가만히 외쳐 본다. 육신과 마음 고통에까지 치유를 얻을 수 있는 지름길로 들어서자고. 내가 변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지킬 것인가. 내 인생은 내가 만드는 것. 아프면 참지 말아야할 결단이 다방면에서 활약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