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유창 목사(몽고메리 사랑 한인교회)
전지(全知)의 하나님과 편재(遍在)의 하나님. 전지(全知)와 편재(遍在)의 하나님은 하나님의 신성(神性)을 나타내는 중요한 말입니다. 시인 다윗은 본 시편 139편을 통하여 먼저 전지(全知)하신 하나님을 노래하면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심을 나타냅니다(1절~6절). “안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스토리가 전개되는 것을 일명, “옴니션스”로 표현합니다. “옴니”란 뜻은 “모든 것”을 함축하여 사용하는 라틴어입니다. 모든 것을 통달하여 알 수 있는 영역은 인간의 한계를 이미 벗어난 것입니다.
우리의 한계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벗어날 수 없는 취약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취약점인 <시간과 공간의 벽>을 스스로 허물고 세우실 수 있는 <전지전능>의 능력이 있으십니다. 바로 이것을 시편기자 다윗은 <긍정의 눈>으로 시인합니다. “야훼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안다>의 전제를 “살펴 보셨으므로”의 표현에서 긍정의 근거를 밝히고 있습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그리고 미래에도 <일관성있는 전지>의 하나님이심을 강한 긍정으로 시인 다윗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안다>는 표현 가운데 가장 강한 표현이 있다면 <식별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네 가지 특성인 <신어서판> 가운데 가장 비중이 높은 평가기준은 판단력을 의미하는 <판(判)>입니다. 옳고 그름을 분간하는 판단력은 <삶의 최고 근간>을 이룹니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할 뿐 아니라, 영원을 좌우하는 것을 <예수님의 십자가 위의 마지막 장면>에서 예수님의 좌우 양편의 두 강도를 통해서 확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바로 이 구속의 하나님을 영안으로 발견한 것입니다. 1절~2절에서 세번씩이나 “안다”는 말로 반복하다가 3절에 가서는 “식별하다”는 말로 강한 긍정의 고백을 합니다. 이 <안다>의 하이라이트는 마침내 5절에서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로 결론을 맺습니다.
다윗의 영적 통찰력은 눈앞의 것만 바라보는 근시안적 차원이 아니라, 영원에서 영원으로 인도하신 <영원하신 구세주, 하나님>을 바라보는 원시안적인 <혜안의 차원>입니다. 5절의 통전적인 성경말씀은 요한복음 10장 27절~30절에서 성취의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안다>로 일관하시는 하나님의 전지성을 <목자와 양의 관계>로 바라보면, 구약의 시편 23편, 에스겔 34장, 신약의 요한복음 10장입니다.
여기에 나타나는 목자는 언제나 앞장 서서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의 형편을 다 알고 있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요10:27~30) <편재(遍在)의 하나님>에 대해서 다윗은 본 시편 139:7~12절에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편재(遍在)>의 신학적 용어는 <옴니플레즌스>입니다. <두루 두루>의 뜻이 담겨있는 <옴니>와 <임재>를 뜻하는 <플레즌스>가 결합하여 “계시지 않는 곳이 하나도 없으신 하나님”,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하나님”, “편재의 하나님”이라고 <긍정의 사람, 다윗>은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139:8~10) 죽음보다 강한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은 “스올의 자리에도 편재하신다”고 고백하는 다윗의 마음에는 하나님은 과연 어떤 존재일까? 그는 본 시편 139편 14절에서 한 마디로 일축합니다. “신묘막측(神妙莫測)하신 하나님”이라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안다>. <식별한다>. <앞뒤를 둘러싸시고 안수하신다>. <신묘막측하시다>. 이 <긍정의 말>을 통해 시인 다윗은 하나님을 <전지와 편재의 하나님>으로 긍정의 신앙고백을 해야 함이 당연할 뿐 아니라, <신묘막측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찬양하라! 감사하라!>고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여 도전합니다. <절대자, 신의 부재(不在)를 절대신앙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우리가 일으켜야 할 영적대각성운동은 바로 <전지와 편재의 하나님, 신묘막측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찬양과 감사>를 회복하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