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천(支泉) 권명오(수필가·칼럼니스트)
1995년(대통령 김영삼) 헌법기관인 미주 동남부민주평화통일 자문위원으로 위촉될 당시 고민을 많이 했다. 그당시 평통에 대한 동포사회의 여론이 좋지 않고 불신인 상태였으며 일부 평통위원들이 자신의 명예와 본국정부와의 이해관계 및 총영사관과의 유착관계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때 군사 쿠데타 실권자인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허수아비 최규하 대통령을 겁박해 헌법을 고쳐 소수의 평통위원들이 대통령을 선출하게 만든 불명예도 있다.
그리고 나는 평통위원이 되겠다는 생각을 한 일이 없고 또한 통일에 대한 남다른 특별한 지식도 없으며 미주 민주 평통위원들이 왜 필요한지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남북 평화통일에 대한 관심은 어느 누구보다 더 강하게 가슴과 머리속에 가득 차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생각일 뿐이다. 그 때문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평통위원의 길을 선택했다. 무엇보다 그 당시 북한에서는 비밀리에 미주한인 친북단체 조직을 추진하고 있었고 또 일부 친북한인들은 공공연히 김일성을 찬양하고 김일성 탄생 축하연까지 하는 실정이었다.
남북 분단과 6.25 남침과 허위선전과 인민재판 및 휴전협정 위반 등을 직접 보고 겪은 나는 북한이 미주한인사회에 친북 조직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미주 민주평화통일위원회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미주 동남부 평통위원회(위원장 박선근) 주최한 통일 강연회에 참석해 연사들의 해박한 통일론에 감명을 받았다. 그 때문에 일부 한인들이 평통을 불신해도 평통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신문에 남북한에 대한 기고도 하면서 북한의 실정과 통일을 위한 길을 알고 싶어 1991년 9월, 9일간 북한을 방문해 그들의 실상을 직접 보고 통일은 멀고도 험한 가시밭길이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게 됐다. 조급하게 서둘고 외쳐도 남북한의 벽이 너무나 높고 견고하기 때문이다. 그 당시 1년에 한 번 씩 해외 평통위원들은 본국에서 통일에 대한 행사와 강의를 듣고 대통령과 기념사진을 찍는 등 선전적인 행사가 이어졌다. 그래도 정권에 정치적인 개입은 없었다.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 당선 후 미주 각 지역 평통위원들이 추가인선됐다. 그들은 김대중 대통령이 군사정권 시절 미국에서 조직한 인권문제 연구소 위원들이었다. 그 때문에 김동식, 한만희 평통위원이 불법으로 임명된 인사에 대한 항의를 하면서 사퇴를 했다. 그들의 뜻과 이유는 공감했지만 그렇다고 줏대 없이 따를 수도 없고 그럴수록 버티고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후 날이 갈수록 평통위원장과 간사는 정권에 줄을 대거나 총영사관과의 로비가 필요해졌다. 그리고 본국 정부정책에 박수만 치는 미주 평통위원회가 되고 말았다. 그 때문에 통일에 대한 전문성 내지 그에 버금가는 참신한 인사들로 물갈이를 해야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