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자(시인·수필가)
글쓰기에 관심을 가지셨던 분께서 그 동안 써온 원고 뭉치를 불쑥 내미셨던 분이 떠오른다. 어느 때는 자신의 심정을 글로 써달라며 속 풀이 하소연을 하시는 분도 더러 계셨고 타주로 떠나면서 고마웠던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해드리고 싶은데 방도를 찾지 못해 ‘행복한 아침’에 자신의 마음을 실어달라시는 분도 계셨다. 모 교단에서 은퇴하신 목사님께서 글쓰기 도움을 요청 해오신 적도 있었다. 이 만큼 살아온 여정에서 이토록 훈훈한 에피소드도 드물지만 쑥스럽기 또한 드문 일이다. 나를 필요로 하는, 분수 넘치는 아낌을 받으며, 도움을 드릴 수 있는 한 가닥 재능이 남아 있었던가 황망스럽다. 살아오는 동안 배고픔은 배고픔을 아는 사람끼리 서로 안을 수 있음이요, 눈물을 흘린 사람이라야 눈물을 닦아 줄 수 있음을 몸소 겪어냈기에 아직 한 오라기 나눔의 궤적이 숨겨져 있었던 것일까. 적이 당황스럽다
이런 일들을 만날 때 마다 ‘글쓰기란 감히 시작할 수 없으리 만치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니며 굳이 고품격 글재주 소유자가 아니어도 가능하다’는 말씀을 올리고 싶다. 보이지 않는 생각, 감정을 글로 옮기는 일을 엄청난 도전으로 받아 들이시는 분들이 지배적임을 인정하고는 있지만 일상과 괴리된 한계는 아니란 것이다.
문학은 문자라는 매체를 통하여 작가 손에서 독자 손으로 전달된다. 독자 손에서 읽음이란 과정을 그쳐 읽는 이의 상상력과 함께 감동이 재조명 되면서 비로소 문학으로의 완성 경지에 이르게 된다. 글쓰기와 마주한다는 것은 하얀 빈 공간은 메꾸어 가는 일로 독자 분들과 공감대를 공유할 수 있다는 기쁨에 글을 써 갈 수 있는 동기화를 얻기도 한다.
글쓰기 소재는 우리네 일상 주변에, 삶의 둘레에, 희로애락 부근에, 그리움 곁에, 외로움 근처에서 서성거릴 때가 많았었다. 애틋하게 글을 쓰고 싶을 때, 외로움이 스며들 때, 무언가 마음의 흐름을 남기고 싶을 때, 그리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일기처럼 부담없이 써내려 가는 기록의 남김으로 시작된 글쓰기가 작가의 반열에 들어서는 단초나 계기가 되는 경우도 있다. 작가가 되겠다는 목표보다 누군가에 건넬 이야기를 써보겠다는 다짐이 자신을 향한 편지요, 자신을 향한 새로운 화해요, 신선한 작가 탄생으로 이어질 수 있는 기폭제나 돌파구가 되는 실마리를 제공받게 된다.
때로는 독백이나 손 편지, 기행문을 적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접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기록이란 진지한 힘을 갖고 있기에 저장된 생각을 바탕으로 새로운 심상을 떠올리며 창조적 구상과 느낌이 더해지면 삶의 진솔한 값어치를 담아낼 수 있게 된다. 방금 세수를 끝낸 맨 얼굴 같은, 솔직 담백한 나와의 만남이 우선되어져야 하기에 어떠한 과시나 가식도 고의적 허위도 힘을 빼야 한다.
읽는 것 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글을 써보고 싶은 열망을 가지신 분들께 전하고 싶은 사명감 같은 동지 애의 비롯 임을 밝혀두고 싶은 것은 습작에 열중했던 그 시간들이 떠올라서 이다. 자신을 돌아보며 깊은 묵상으로 숙성된 글은 다시금 읽어도 그윽한 감명이 설렘으로 여울을 이룬다. 수필을 붓 가는 대로 쓴다고들 하지만 붓을 끌고가는 보이지 않는 생각의 흐름과 분부를 따라야 한다.
그 간에 임해온 글쓰기는 삶이 펼쳐낸 숱한 결과를 내 탓으로 돌리는 반성의 읊조림 소곡으로 낮은 자리를 자처하는 훈련이었다. 나를 다듬어 가는 길이었다. 깊은 밤 일상 중에 떠올랐던 단상들을 꺼내놓고 원고지에 옮겨가다 보면 쓰기 이전에 세상 분진을 한 꺼풀 씩 벗겨내는 작업이 우선 일 것이란 생각이 앞섰다. 글쓰기를 준비하는 바탕인 마음에서 삶을 각성하는 흐름으로 글쓰기가 이어져 왔다. 수필은 산문으로 쓰이기 십상이지만 그간 써온 글들은 운문에 가까웠다. 수필이 한 편, 한 편 태어날 때 마다 퇴고와 완고 과정의 이룸 여부보다 값진 내면적 깨달음의 고지에 작은 눈금 한치라도 다가섰는지 마음이 쓰인다. 펜을 들고 글을 쓰고 있는 수 많은 문인 중 같은 문체로, 같은 글 감을 두고도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자신 밖에 없다. 스스로를 고립시킨 고유성으로 써가는 것이 문인의 길이다.
글쓰기는 나를 다듬어 가는 길이었고, 나를 만들어 가는 길이기도 했다. 후회 없는 시간을 보냈다. 해가 뜨면 산책길에서 사색을 하고 해가 지면 깊은 밤과의 밀어를 나누는 일을 거듭해왔다. 많이 만나고, 대화하고 함께 보고 듣고, 함께 먹고, 낯선 것, 익숙한 것 가릴 것 없이 겪어내며 잊기 전에 파일에 담아냈다. 그리 큰 욕심은 없다. 나만의 보폭으로 걸어왔지만 제자리는 보존해 내려 한다. 언제라도 후회 없는 마침표를 찍어내기 위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남겨두어야 하기에.